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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Dec 18. 2019

사람 일은 모릅니다

입시의 추억

   나른한 오후, 스타벅스 머그컵에 맥심 화이트 골드 커피 믹스를 타서 사무실을 가로지르다 일련의 무리를 발견했다. 앞장서서 걷는 사람들은 인사팀 같았고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만히 살피니 신입 사원 같았다. 아니면 인턴이나 산학 장학생 같기도 하고 뭐 여하튼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직 이 회사의 모든 공간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한편으로는 자부심,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사람들.

 

   요즘~이라는 말을 쓰면 꼰대라던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취업문은 점점 좁아졌고 요즘 입사하는 친구들의 이력을 보면 '와… 내가 몇 년 더 빨리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출중한 스펙들이 많았다. 다양성을 자랑했던 출신 학교들도 취업문이 좁아질수록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개 학교들로 좁혀졌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자면 취업 전쟁이라는 '인생의 첫 번째 큰 경쟁을 잘 이겨냈구나'라는 대견함이 들기도 했다.. 호황기에 채용을 해서 정말 우리끼리는 강아지나 소나 다 들어온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취업 전쟁의 돌파가 저 친구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인생의 '첫 번째' 큰 경쟁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라면 인생의 가장 첫 번째 큰 경쟁은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시기에 치른다.. 대입 입시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어른이 되기 직전에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첫 번째 관문,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성인식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일지도 모르겠다. 그 성인식을 거쳐야 우리는 어른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성인식이 그렇듯 남은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며.


   나는 내가 나온 대학교에 일말의 자부심도 없었다. 나의 입시 전략은 대실패였다. 대부분의 수험생이 고득점을 받던 그 해에 이과생에게 가장 중요한 수리영역 1을 난 망쳐버렸다. 모의고사에서 평균적으로 얻어내던 점수보다 떨어져 버렸으니 망친 게 맞을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라더니.... 당연히 대학교 진학 계획은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진 상황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갈 수 있었던 대학교들이 수능 시험 이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인 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학교들에 가려면 지망하려고 했던 과를 바꿔야 했다. 세상 모든 학문에 우열이 있겠냐마는 적어도 입시로 한정한다면 낮은 점수로 갈 수 있는 과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남자는 전자공학적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지금도 쉬는 날에 전공 서적을 들춰보는, 타고난 공대생인 형의 영향으로 난 강제 직진을 하게 되었다. 매 월드컵마다 대한민국 축구팀이 맞닥뜨리는 상황, 치열한 골득실 계산이 있어야 16강에 갈 수 있듯이 난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합격 여부를 짐작할 수 없게 된 학교의 공대 전자계열 과들에 눈치 작전 없이 첫날 원서를 접수했다. 원서 접수 시간이 오픈하고 가장 먼저 지원서를 넣은 것이 아마 내가 아닐까 싶다. 마치 유명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듯 오픈 시간이 땡~~ 울리자마자 지원서를 넣고 난 직감했다. 이번 인생 쉽지 않겠구나...

 

   형은 생각했던  같다. 남자가 공대에서 전자계열 전공을 선택하지 않으면 대학교 자체를 가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 다른 과를  바에는 재수를 하면 된다!!!  생각이었던  같다. (나중에 술을 한잔 마시며 대화를 해본 결과  생각을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여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애초에 공대 혹은 이과에 맞는 사람이 아니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이과 생활을 하며 나의 문과적 기질이 후퇴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이  번째였고 절대 재수를  생각이 없다는 것이  번째였다. 나란 사람은 여백의 공간에서 열정의 에너지원을 충전하는 사람인데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자율학습이 의무였고 3년간 학교에 나가지 않은 날이 명절 당일과 전체 방학의 5분의 1 정도뿐인(그나마 1~2학년 방학) 그야말로 사설 교도소 같은 학풍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서울임에도 어디서 그런 땅을 골랐는지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창밖을 바라보면 이런게 수감 생활인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청소년 계도에 최적화된 입지를 자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처음 학교에 입학하고 바로 다음 주에 시작하는 야간 자율학습에 들어가며 뭔가 인생의 긴 터널에 들어가는듯한 절망감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있다. 가장 중요하다고 일컫는 고2 겨울방학에 교실에 갇혀 눈이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물 2, 물리 2 문제집을 풀며 이 문제집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에 심각한 의심을 가졌던 기억 역시 남아있다. 재수를 한다면 장소가 재수 학원으로 바뀔 뿐이지 그걸 다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기본 소양이라는 이름으로 과목은 또 얼마나 많나? 공대로 진학할 사람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지역마다 기후가 어떻게 다른지 왜 알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1년간 그런 짓거리를 할 생각이 난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세상살이 많은 것이 그렇듯 서로의 생각은 다르지만 어느 한쪽의 힘은 강력했고 당시 난 저항할 명분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저항을 할 생각도 없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공허함에 사로 잡힌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랐다.(물론, 전통적으로 이런 공허함은 의대에 갈 정도의 성적을 받은 사람만이 느낄 자격이 있겠지만)


   그렇게  의지와 상관없이 상향 지원이 집에서 결정되었고 원서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최대한 많은 학생을 인서울에 일단 보내야 하는) 담임 선생님을 비장한 각오로 찾아갔다. 우리 학교는  지원서 작성 면담을 치사하게 수능 성적순으로 시간을 잡아서 진행했는데 주로 부모님이 같이 갔다.  날은 학교 다니면서 대화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교감 선생님까지  반을 돌아다니며 직접 조율을 했다. 요주의 인물(성적이 아주 좋거나 애매하게 소위 명문대와 일반대 사이에 걸친 인물들) 면담 시간에는  반을 찾아가 담임 선생님 옆에 동석해서 어르고 달래며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의 역할은 상향지원을 최대한 틀어막고 흔히 말하는 SKY 진학 비율을 최대한 높이는 것에 있었다. 여기에는 상위권 대학의 지방 캠퍼스 진학을 유도하는 작전도 많이 쓰였다. 멘트는 똑같았다. ‘ 캠퍼스 가서 열심히 하면 본교로 올려 보내준다? 그럼 졸업장은 본교로 나가는 거야~~!!! 어설픈 인서울 가봐야 쓸모도 없어!’ 학교 자체의 분위기가 이런 마당이니 온통 상향지원을 써간 나의 지원서는 담임 선생님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평소 인내심이 별로 없던 그는 그날만큼은 애써 웃으며 내가 불과   (마지막 모의고사)에는 안정권이었던 학교들의 과가 이제 미래를 점칠  없는 승부가 되었다는  계속 자각시키려고 했다. 나에게는 그게 마치 ‘이제 세상이 변했다.’ 말로 들렸다.  그것에 대꾸할 마음도 없었으나 함께  형과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런 과를 보낼 거면 '얘는 그냥 지금  길로 재수 학원에 등록시키겠습니다' 같은 뉘앙스로 담임 선생님의 설득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결국 담임은 포기하며 대신 당시 , , ,  군중에서 하나는 하향 지원을 하자고 했다. 남자는 대학교를 가지 못하면 바로 영장이 나오므로 일단 심적 안정을 위해 하나는 합격해놓고 재수를 하더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형과 아버지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눈이 오던  원서를 접수하며 구경한  ‘보험처럼 입학이라도 하자 했던 학교가  대학교 모교가 되었다. 같이 학교를 둘러보던 형한테 ‘여긴 오늘 이후  일이 없는데 그만 둘러보고 집에 가자 했던 것이 아직 기억난다. 녀석아 조금  신중하게 말했어야지..

 

   예상대로 고득점자가 유독 많았던 그 해 나처럼 어중간하게 시험을 망친 친구들은 예외 없이 쓴맛을 봤다. 다시 말하면 대다수 학생들이 상향지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하향 지원에 걸쳐서야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야말로 눈치 작전이 빛을 발한 해였다. 변별력이 없어진 점수에 상위권 대학교의 상위권 학과는 합격 점수가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낮은 과는 오히려 미달이 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들 못 먹어도 고!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건가? 한국 사람들의 도전 DNA를 그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의 상향 지원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뚜껑을 열어보니 나보다 점수는 낮아도 눈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한 친구들은 지망 학과를 대폭 하향 조절하여 상위권 학교로 진학했고 나는 보험 삼아 걸친, 기나긴 수험 생활 내내 한 번도 진학을 생각한 적이 없는 학교에 심지어 전액 장학금도 아닌 등록금을 내고 진학했다. 삶은 비극이라고 했던가? 인생이 결과만을 말한다면 나의 모든 노력은 의미 없었다. 어디에 입학했는지만 보일 뿐이었다. 복싱 시합으로 따지면 힘을 다 써가며 쉐도우 복싱을 하고 정작 실제 시합에서는 1라운드에 얻어맞고 실려나간 셈이었다. 시합을 준비하기 위한 몇 개월이 그 1라운드로 끝나버린 상황이 당시의 딱 나의 상황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내가 빠져든 공허함은 그런 인생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절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실수든 뭐든 수능 당일 시험을 망친 나는 내 지난 6년(중학교 때부터 점수 줄 세우기가 본격 시작되므로)이 아무런 의미 없이 느껴졌다. 시험 당일에 재수가 없어서 배탈이라도 나서 시험을 망친다면 지난 시간 준비하기 위해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모든 욕망을 내리누르며 공부한 시간은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인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재수, 삼수라는 자신의 선택권이 있지만 그 시간을 투자한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그런 불안감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 왜 나의 열아홉 살 겨울은 이리 가혹한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시는 정시 발표가 나면 고등학교 정문에 무슨 무슨 대학 몇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추가 합격자 발표가 나올 때마다 숫자가 한두 개씩 올라가는 그 현수막에 내가 합격한 대학교는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삶은 비극이었다. 마치 2등 시민이 된듯한 자괴감에 졸업식도 가기 싫을 정도였다. 그 현수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열아홉 살의 나는 인생의 실패가 이런 것이라는 걸 자조 섞인 웃음 속에 받아들여야 했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나와 비슷한 케이스로 기대했던 학교에서 동떨어진 학교에 합격한 친구들의 소식뿐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내가 뭘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 자아실현을 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 학교 졸업장을 받고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또 다른 시간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 이야기하지 말자. 이미 너무 길어졌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하고 계절이 여러 번 바뀌며 비로소 '사람 일은  모른다.' '길게 봐야 한다’ 같은 당연한 말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당연한 말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내 모교는 나에게 ‘사람 일은 모른다’를 가르쳤다. 돌아보면 그전까지 난 삶은 대부분 명확한 인과 관계로 이어져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이 곧 미래다 같은? 고등학교 내내 '지금 너희가 흘리는 땀방울이 스무 살 이후 통학하는 대학교의 전철역을 정한다' 뭐 이런 세뇌를 당하니 삶에 연속성은 없고 명확한 인과관계의 성공과 실패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알고 있던 풋내기 나에게 위대한 나의 대학교 모교는 '인생이란 게 그리 간단하게 정의되는 게 아니란다'를 가르려 준 셈이다. 전공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내가 학교에서 배운 전부는 그것뿐이기도 하고 가장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삶의 진리이기도 하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며 그런 의외성이 반드시 비관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런 의외성이 있기에 삶을 살아볼 만하다. 달리 생각하면 내가 보험용이든 뭐든 이 학교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의지할 곳 없이 바로 영장을 받아 들고 재수의 선택권도 없이 군대에 가야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학교지만 그 합격장 덕분에 남들처럼 20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학교였지만 도서관 장서만큼은 많았고 오래된 책들 또한 꽤 보유하고 있었기에 1학년 남아도는 많은 시간을 퀴퀴한 냄새가 나는 별관 열람실에서 보냈는데 그 시간들이 결국 나를 위로했다. 지금 이곳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때의 시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수능을 그렇게 보고 원하지 않던 학교로 진학해서 모교가 된 것을 이제 겨우 인생의 3분의 1 정도 살아온 내가 성공이다 실패다 논하는 것 자체가 경솔한 생각인 것이다.

  

   다시 오늘로 돌아와서, 마주친 신입 사원들이 인생의 큰 경쟁을 뚫고 들어온 이곳에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고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개월만 지나면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반대로 흘러간다는 걸 깨닫게 될 가능성이 크고 실망도 하게 될 것이다.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과정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겪는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느냐'가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경험은 의미가 있으며 피하지 않고 집중하다 보면 또 다른 길로 이어질 테니까. 신입 사원들을 보며 생각했지만 그건 요즘의 나에게 필요한 생각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그 신입사원들을 보며 지금 나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나를 위한 위로이기도 하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인생이 여러 개의 출구를 가진 터널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출구를 가진 일직선의 터널이 아니고 인생은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는 여러 개가 있는 터널이다. 그래서 길을 찾기 힘들지만 열심히 가다 보면 출구는 반드시 있다. 복잡하게 꼬아놓고 출구는 하나만 있는 미로는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길을 잃는 것 같아도 벽을 더듬으며 어쨌든 집중해서 걷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빛이 쏟아지는 출구가 반드시 나온다고 믿는다. 정말 지옥 같은 날들에는 그게 잘 와 닿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걷다 보면 또 다른 삶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결국 내 인생을 지탱할 것이므로. 사람은 그렇게도 성장하는 것이겠지.


그런 면에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줄 필요가 있다. 웃는 듯 우는 듯 그런 미소라도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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