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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Jul 15. 2019

여행의 시작

봄의 프롤로그

   설레는 첫 유럽 여행의 시작이었다. 티켓팅을 할 때만 해도 충동적이었지만 후회는 없을 거라 믿으며 결국 출발하는 날까지 왔다. 유럽도 처음, 밤 비행기도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현지에 오래 있기 위해서 아침 비행기를 타곤 했는데 유럽은 가는 시간이 걸리니 전날 밤 비행기를 타야 꽉 채운 아침을 현지에서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아침과 사뭇 다른 느낌의 인천 공항은 텅 비어 있었고 복작거리는 공항에 익숙했던 나는 전혀 다른 느낌 속에 비행을 기다렸다. 혼자 떠나는 여행, 아무도 의지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간단한 영어 회화 책을 읽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번 비행은 여러 의미가 있을 테니 너무 처음부터 많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혹시나 놓칠까 봐 미리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들을 읽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오직 설렘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것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흔들어 많아지는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탑승이 시작된 비행기에 올라탔다. 뒤늦게 예약한 탓에 비즈니스석도, 요즘 유행한다는 이코노미 컴포트 석도 이미 만석이었다. 즉, 내게 주어진 자리는 유독 좁다고 소문난 이코노미석이었다. 여행의 시작이 그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 작은 공간이 많은 설렘으로 가득 차기를 내심 바랬다. 돌아올 때 그 공간을 수많은 행복한 기억으로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기도했다,


   좌석은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좁았다. 걱정했던 생존 영어는 친절한 승무원분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 밥은 굶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역시 뭐든 닥치면 해낼 수 있는 거겠지. 아니 뭐든이 아니라 어떤 것들은 그럴 것이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꽤나 많으니까 말이다. 그걸 알기에 이 여행도 떠나온 것 아니겠나?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눈앞에 닥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생각했다. 멀어지는 사람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대부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게 해주었던 안내방송 화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 화면을 볼 때만 해도 이번 여행의 유일한 스트레스는 너무나도 좁은 KLM(네덜란드 항공)의 좌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12시간 가까운 비행은 여행의 설렘이 없었다면 견딜 이유가 없는 고난에 가까웠다. 다리를 길게 빼고 앉으면 바로 앞좌석에 무릎이 닿는 좁은 공간에서 반나절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유럽의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고난을 견뎌야 한다니 역시 뭐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이 저절로 실감됐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옆좌석은 곧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고 화장실 한번 가기 겸연쩍은 상황이 이어졌다. 지나가려면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양해를 구해야 했는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지나가도 될까요?’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양해를 평소 일상에서도 구하고, 얻고 있을까? 그러지 못해서 어떤 관계는 멀어지고 끝나버렸던 것은 아닐까? 최대한 옆의 사람의 몸에 닿지 않도록 지나가며 내가 구하지 않았던 ‘양해’들을 생각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경유를 하고 도합 14시간 넘는 비행 끝에 비엔나로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이제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이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의 비극은 꼭 가장 찬란한 시절에 온다더니 여행 첫날 직격탄을 맞았다. 하필 출국 전 회사에 일이 터져 공항에 가면서도 계속 수습을 위한 통화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애써 기분 탓일 거라 여겼다. 생각해보면 벌어졌어야 할 일이 벌어진 거니 기분 탓도 무슨 탓도 아니지만 시작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돌아보면 그건 어떤 ‘징조’였을까? 여행 첫날 저녁에 이 여행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생겼고 동시에 좋지 않은(최악이라는 표현은 아껴둬야 한다면) 소식까지 전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표현을 다르게 적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을 하필 첫날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내 감정에 이보다 더 나쁠 일이 살면서 몇 가지나 될까 싶은 상황을 하필 여행 와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모른다고 하는 걸까


   첫날 바로 귀국 편을 알아보다 일단 주어진 여정은 소화하기로 마음먹었고 이제 부다페스트에 머물고 있다. 이번 여행이 내게 어떻게 추억될지는 분명하다. 분명 아름답겠지만 여기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바다 건너가며 풀어내지 못한다면 커다란 굴곡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부다페스트는 혼자 있기에 좋은 도시 같다. 어찌 보면 근사한 경험이라는 생각도 든다. 삶이 나를 어루만질 생각이 없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근사한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물론, 이 기억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상상도 못 할 아픔을 견뎌야 할지도 모르고 공룡이 화석으로 남듯 영겁의 시간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가야만 한다. 이곳은 내 마음도 모르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지만 회색 빛이 감도는 도나우 강가에 한번 가봐야겠다. 혼자 보는 이국의 강은 어쩌면 많은 것을 이겨낼 힘을 줄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그도 아니라면 비워낼 공간을 제공해주겠지.


   이 이야기는 이 여행이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난 지금 그때 써놓은 짧은 글에 못다한 말과 감정을 보태 쓰며 시작되었다. 위에 적었던, ‘바다 건너가며 풀어내지 못한다면 커다란 굴곡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 답은 아직 하지 못했다. 직선으로 나아가는 시간순으로 쓰기보다는 돌고 돌아 앞으로 나아가는 원형 작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그 여행을 다시 돌아보고 그때 쓴 글과 지금 돌아보며 쓰는 글을 모아 내 마음에 남은 여행을 정리하고 싶다. 그 과정을 함께 읽고 생각해줄 사람이 있다면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다. 이야기가 더딜 수도 있고 잠시 멈출 수도 있고 갑자기 뒤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앞으로 밀고 나갈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오래 멈춰 서서 생각을 가다듬게 되더라도 너무 탓하지 말고 이 여정을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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