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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ug 04. 2021

어머니 나라의 말

“이리 나와봐.”

“응, 올게.”

“ ‘올게’가 아니라 ‘갈게’ 해야지.”

인도 유럽어권 국가 교민 가정의 흔한 대화이다. 우리말 ‘오다’와 come에 해당하는 동사를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하는 바람에 한국말이지만 한국말이 아닌 말이 만들어지는 현장이다. 내 입장에서 너는 나에게 오는 거지만, 네 입장에서 너는 나를 향해 가야만 하는, 즉 입장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심오한 국어 동사의 세계가 인도 유럽어권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딸아이가 어린이 집, 유치원과 같은 시설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말 보다 현지 언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아이는 우리말보다 현지 언어를 더 편하게 사용했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집에서 하는 대화의 내용은 한계가 있다. 한 살 한 살 더 먹으면서 두 언어 사이의 아이의 어휘는 균형을 잃었다. 능숙하게 현지어를 구사하고 친구들과도 문제없이 소통하는 아이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서운하기도 했다. 아이에게 묻지도 않고 해외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이기적 이게도 아이가 꼭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길 바랐다. 모국어, 어머니 나라의 말, 꼭 그 말이어야만 나를 다 표현할 수 있고, 내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 나의 아이도 어머니 나라의 말을 알아 ‘어머니’를 이해하고, 그 말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이기적이라고 하여도 포기할 수 없다. 나와 같은 교민 부모에게 해외에서 운영되는 한글학교는 고맙고 절실한 기관이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한글학교도 같이 입학을 하고, 알파벳을 배우면서 기억, 니은을 같이 배웠다. 어려워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한글을 떼고 더듬거리며 국어 교과서를 읽는 아이의 모습은 욕심 많은 내 마음을 기쁨과 감동으로 가득 차게 해 주었다. 이제 어린이를 벗어가는 아이는 토요일에 한글학교에 가기보다 다른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기도 한다. 되도록이면 아이를 존중해주는 신식 엄마 흉내를 내느라 애를 쓰는 편이지만, 한글학교 얘기가 나오면 별수 없이 꽉 막힌 엄마가 되고 만다. “엄마, 아빠를 바꾸지 않는 한 한글학교 안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엄포가 몇 년이나 더 먹힐지 모르겠지만, 딸이랑 같이 우리말로 영화도 보고, 뉴스도 보고, 옆집 사람들 흉도 보고, 사랑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싶은 소망을 절대 놓을 수 없기에 엄포가 안되면, 감언이설 그것도 안되면 뇌물이라도 써가며 한글학교를 고집할 작정이다.

재외동포재단의 통계에 의하면 약 천오백여 개의 한글학교가 세계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등록 학생이 여남은 되는 소규모의 학교도 있지만 학생수가 100명을 넘는 규모의 학교도 있다. 한글학교는 현지인들에게 우리말 교육을 하는 교육 기관인 세종 학당과 달리 교민 자녀들을 1차적 교육 대상으로 하는 학교다. 이러한 한글학교는 재외동포재단과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다양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사용하여 국어를 지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회화, 어휘 중심의 외국어로서의 우리말 교육에 중점을 두는 학교도 있다. 

교민들에게 한글학교는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기관이자, 일주일에 한 번, 보통 토요일에 모여 편하게 우리말로 소통할 수 있는 모임이기도 하다. 할 일도 많고 갈 데도 많은 주말이지만 교민들은 우리말이 반쯤 익숙한 아이들을 앞세워 더러는 다른 도시까지 이동하는 수고를 감수하며 한글학교에 출석한다. 아이들이 수업을 하는 동안 학부모들은 삼삼오오 모여 근황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가 하면, 추석, 설 같은 우리 명절에는 팔을 걷어 부치고 잔칫상을 차리기도 한다. 한글학교에서는 맞춤법, 높임법, 음운 규칙 등을 배울 뿐 아니라, 세배도 배우고, 한국의 국경일에 대해서도 배우고, 제기차기, 윷놀이 같은 민속놀이도 배운다.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은 교민, 유학생 중에 교원 경험이 있거나 차세대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선생님들의 자격 조건이나, 이력은 교민 사회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교민 역사가 오래고, 교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한글학교 선생님 되는 게 쉽지 않고 그만큼 대우를 받는다고 하지만, 교민이 적고, 규모가 작은 한글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열정이 가장 큰 자격이다. 

코펜하겐에도 재외동포재단에 등록된 한글학교가 있다. 학생수 서른 명 남짓의 덴마크 한글학교는 규모는 작지만 학생들의 나이와 수준에 맞추어 학급을 구분하여, 우리나라 국어 교육과정에 준하는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설날, 추석, 한글날 같은 우리나라의 명절에는 부모님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고 교민들과 덴마크 현지인들을 초청하여 한국 음식을 나누는 바자회를 열어 교류의 장을 넓히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온 유럽이 마비되었을 때에도 온라인을 통해 소 그룹 혹은 개인 지도를 하며 수업을 이어왔다. 대부분 한글학교가 그렇듯이 덴마크 한글학교도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고, 늘 손이 부족하지만, 아이들 교육에 마음을 두시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로 강제 이주를 했던 동포들이 언 땅을 손으로 일구며 처음 한 일이 학교를 세운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6세대에 이어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들은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전히 우리말로 교육하는 조선학교를 고집하고 있다. 강제 이주했던 분들, 재일 교포 분들 만큼 숭고하지는 않겠지만, 오늘의 교민들도 전 세계에서 저마다의 간절함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재외 동포들의 간절한 마음이 결실을 맺어 해외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 말에 담긴 ‘우리’의 ‘우리스러움’을 간직한 어른이 되길 바란다. 이방인이지만 또 이방인이 아닌 우리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간절히 전한 어머니의 말이 부디 안식을 선사하길 꿈꾸어 본다. 


작은책 8월호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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