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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쟁이 Apr 06. 2024

천 개의 파랑일까 천 개의 불행일까

천선란, <천 개의 파랑>

매년 무더운 여름이 되면 언론들이 쏟아내는 기사가 있다. 동자동 쪽방촌이나 노원 백사마을 등의 달동네를 돌아보며 주민들이 더위를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있나 조명하는 기사들이다. 길은 어른 두 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쪽방은 사람 몸 하나 눕히면 더 이상 남는 공간이 없다. 그걸 보고 많은 독자들이 "아, 나는 그래도 행복한 편이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기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가난과 어려움을 전시하며 억지로 눈앞에 들이미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의 한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을 억지로 가져와 "이들은 불행하다, 당신은 운이 좋다는 걸 알아야 하고 이들의 불행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은 아닐까.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도 그런 류의 불쾌함이 들었다. 시간상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30% 정도를 남겨두었다. 기술 발달을 굳이 따라잡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사회가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 인간을 위해 발달한 기술이 어떻게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을 소외시키는지 은혜, 연재, 보경, 콜리, 투데이 등 다양한 존재들의 배경을 통해 보여준다. 이야기 자체는 설득력 있게 잘 직조됐다고 느낀다. 보경에게 있어 휴머노이드가 어떤 존재였고 은혜와 연재에게는 기술 발달이 어떻게 느껴지고 있을지 와닿았다. 이미 키오스크가 인간 인력 상당수를 대체하고 있는 세상에서 휴머노이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휴머노이드가 발달함으로써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정도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등등에 대한 미래상도 나름 그럴듯하게 그렸다고 느꼈다.


다만 나는 이렇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겠다.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소설이니만큼 아무래도 일반적인 경향성에서 벗어난 인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심하게 소외된 존재를 한데 모아 전시하는 것 아닌가. 과연 연재와 은혜가 거리감을 느끼는 같은 반의 다른 친구들은 일상의 고민이 하나도 없을까. 유전병 때문에 렌즈 삽입 시술을 받지 못해 미국까지 날아간 주원은 왜 은혜에게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돼야 했나. 지금도 드라마에서 말을 촬영에 함부로 동원한다고 얘기가 나오는 세상인데 과연 인간이 기술이 발달한다고 인간 외의 존재를 그렇게 혹사시키기만 할까. 소외된 이들을 한데 모아 늘어놓는 '불행 종합세트'를 보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꼭 회의를 느껴야 하는 건가.


나는 어떤 이야기든 말하기(telling)보다는 보여주기(showing)라는 방식이 좀더 세련됐다고 생각하는데, 천 개의 파랑은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소설이 아닌가 싶어 여러 모로 아쉽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쪽이 같은 인공지능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더라도 좀더 내 취향에 맞았던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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