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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똥가리 Apr 18. 2022

시간을 멈춰 세웠다.

숙제 같은 시간.

우리나라엔 참 좋은 곳이 많다. 산이 많아서 축복을 누리는 나라다. 산 능선이 겹겹이 둘러선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혜택이다.


지리산 노고단에선 새벽 골짜기를 채우기 시작하는 운무가 꿈틀꿈틀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동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활공장에서는 물빛 산자락이 이어지는 고요의 능선을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산수화 같은 풍경엔 한국인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있다. '아스라이'라는 말의 뉘앙스를 아는 우리만의 정서.  나는 그 정서가 마음에 짙게 퍼질 때 평안을 얻는다.




4월 합천으로 떠난 여행에서 "산, 밤, 별, 바람, 고요"와 함께하는 브레이크 타임을 누렸다. 고요의 시간.


경상남도 합천은 다른 지역과 확연히 색다른 풍경을 가진 곳이다. 촬영을 위해 가야산과 해인사, 철쭉으로 유명한 황매산을 갔던 기억을 떠올려 후배들과 다시 한번 여행을 갔다.


합천댐으로 인해 생겨난 호수가 산과 산 사이사이에 모여 있는 이곳은 문명의 불빛이 적어 은하수와 별자리를 보기 좋은 여행지로 근래에 이름을 타기 시작한 것 같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sns라는 것이 스펙이 되어 가고, 모바일 카메라 등의 사진 기술의 발달한 것 등이 숨은 곳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데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합천 황매산 정상부 (아이폰 13 프로로 촬영)


아주아주 오래전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 이런 고요와 적막과 온전한 평화를 누린 게 얼마만인지. 잘 닦여진 길을 따라서 정상 아래 주차장까지 밤 드라이브로 올라간 후, 후배들과 함께 깜깜한 밤 길을 터벅터벅 걸어올라 별을 볼 자리에 누웠다.


까맣고 어둑한 사위를 밝히는 것은 반달과 뚜렷하게 빛나는 별뿐이었다. 적당히 서늘한 공기. 내 숨소리가 내 귀에 온전하게 들릴만큼 조용해서 아주아주 오래된 태고적의 시간대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합천 황매산으로 여행을 가기 전, 3월 한 달 동안 시간을 멈춰 세운 채 지냈다. 평생을 하던 일을 접고 난 후, 눈대중으로 세상을 쫓느라 세월을 흘려보내고 나니 잠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모든 중년이 겪게 되는 시간일 수 있다. 만약 멈춤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행운을 만난 당신의 삶도 축하하고 싶다.


주변의 삶을 무심코 따르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목적지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조금 더 일찍 해야 했을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후회만큼 쓸모없는 게 또 있을까. 알면 되는 것이지.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롭게 '바라볼 곳'이 필요하다. 현재(지금은 과거가 된 시간)에 지나치게 만족하며 그 순간에만 빠져 살았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다른 것을 찾는데 버퍼링이 걸려버렸다.


렉이 걸린 머리로는 시간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를 되짚는 시간을 가지느라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이 된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시간을 견뎌낸 곰처럼. 불쑥불쑥 호랑이처럼 뛰어나고 싶은 충동도 들지만 지금은 곰이어야 할 것 같아서 버티는 중이다. 딱 멈춰버린 시간.


같은 24시간이라도 사람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와 깊이가 다른  같다. 매우 느리게 슬로 모션 마냥 하루가 지날 때도 있고, 눈치챌 사이도 없이 뚝딱 지나버리는 시간도 있다. 무엇이 좋은 건지는 각자 마음의 나름 아닐까.


아무튼 지금 나의 시간은 의도적이거나 혹은 어쩔  없는 이유로 멈춰 세워졌다. 멈춰진 시간은 매우 깊고 고요하게 흐른다. 그리고 나니 비로소 온전히 내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깜박 잊고 았던 나의 본디 모습.


숙제 같은 시간......

 시간, 귀하게 나에 관하여 숙고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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