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결혼 생활, 호르몬
이 세 단어의 조합을 차례대로 읽은 당신은
아마 야릇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이 글을 클릭했을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야한 얘기는 눈곱만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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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2024년 트렌드 키워드에 이런 게 있다.
'도파밍'
이 단어는
신경전달물진인 도파민과
'경작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farm의 동사형인 faming이 결합한 신조어이다.
즉, 도파민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분초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이 다른 곳에서 시간을 아껴
도파민, 즉 쾌락을 충족할 만한 행동에 집중하는 태세를 보이는 사회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도파민이 대체 뭔데 그렇게
신조어까지 나올 만큼 유난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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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은 쾌락호르몬이다.
과학자들은 중독자들을 다룰 때 도파민을 보편적인 도구로 설정한다.
마약중독, 섹스중독, 음식중독 등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매운맛 자극들은
우리의 도파민을 공략하고야 말겠다는 유일무이한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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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남편과 나는 둘 다 회사에 다닌다.
그래서인지 어째서 인지는 몰라도 평일에는 각자 따로 논다.
저녁밥은 꼭 함께 먹자고 약속했건만
시끄러운 배꼽시계는 하루를 힘겹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배우자를 기다려줄 만한 여유가 전혀 없다.
강아지 산책도 그렇다.
날이 좋은 날은 꼭 같이 걷자고 했건만
가뜩이나 무거운 엉덩이는 밥을 먹고 나면
의자에 풀칠이라도 한 것 마냥 절대로 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채우는 방법도
완전히 다르다.
남편은 영상을 즐기는 편이고
나는 활자를 즐기는 편이다.
남편은 티브이방에서
나는 안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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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영상물을 좋아한다.
다만,
남편은 다수의 프로그램을 애착하는 편이고
나는 스트릿우먼파이터만 애착하는 편이다.
이렇게 우리 서로는 물론 서로를 가장 애착하지만
가끔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남편이 유튜브에 빠지거나
내가 스우파 재방이나 돌려보고 있는 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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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둘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봤다.
'아, 이게 룸메이트가 아니고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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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음을 먹을 필요가 있었다.
분명히 내가 원하는 부부 일상은 이게 아니었고
나 스스로가 '뭔가 이건 아니다.'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것은 포기이고
나는 내 남편에게 포기를 들이밀 만큼
남편을 덜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쏟아부을 에너지와 감정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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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트렌드에 민감했어?
도파밍 말고, 세로토닝 하자!'
(도파밍과 라임을 맞추고 싶어서
세로토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보았는데
왠지 '토닝'이라고 하니까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피부과에서 '토닝'받으면 각질관리, 노폐물관리 등등을 해준다.)
세로토닌은 행복호르몬이다.
틱톡을 볼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산책을 할 때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식이다.
몇 시간씩 자극 영상이나 돌려보고 있을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명상을 할 때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도파민은 욕심이 끝도 없는 쾌락 호르몬이고,
세로토닌은 소소한 행복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하는 행복호르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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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날부터 우리는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나란히 앉아 천천히 저녁 식사를 하고
남편은 접시를 닦고, 나는 청소기를 돌린 다음
함께 강아지 산책을 나선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짧게 가네 어쩌네
작은 의견 마찰을 줄이기 위해
평일 코스, 주말 코스도 애초에 정해버렸다.
날씨가 험궂지만 않으면
함께 걷기로 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시간이다.
씻기, 홈트레이닝, 독서, 글쓰기 등등
각자가 원하는 활동을 자유롭게
하면 된다. 그리고 졸릴 때 알아서 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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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각자의 도파민을 아예 포기한 것이냐?
아니다.
남편은 자유시간에 유튜브를 보고
나는 스우파 본방을 남편과 '함께'사수한다.
평화로운 조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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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은 쾌락 호르몬이지만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쾌락은 고통으로 바뀐다.
중독자를 떠올리면 부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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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또 다른 키워드에는
'분초사회'가 있다.
이제 더 이상 100원, 200원 아끼려고
여기저기 기웃대지 않고 한 군데서 다 사버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직접 몸을 움직여 마트에 가지 않는다.
왜? 우리에게는 쿠팡이 있으니까.
처음에 분초사회라는 개념을 익혔을 때
'아, 사람들이 소비적인 시간을 아껴 생산적인 시간에
투자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트에 가지 않고 손가락으로 쇼핑을 함으로써
대폭적으로 시간을 아낀 사람들은
책을 읽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산책을 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운동을 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도파민을 추구하는 트민녀 트민남인가
아니면
트렌드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이탈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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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트렌드 말고 트렌드를 꾸역꾸역 거스르는
역행자가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