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이들이 잠든 다음의 시간

by 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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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아이들이 잠든다.


회사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고, 그러고 나면 어느새 밤 10시다. 몸은 이미 하루치의 에너지를 다 쓴 상태이고, 소파에 앉으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은 시간. 보통이라면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노트북을 켠다.


하루 종일 일하고, 육아까지 마치고 겨우 얻은 자유 시간에 또다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내일로, 주말로 미루려 해도 결국 그날 밤 노트북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취향을 고른다는 의미에서 Pick, 거기에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를 붙여 Pickify. 나에게 맞는 책을 골라내고, 내 취향을 발견하는 공간이라는 뜻을 담았다.


이름이 정해지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전까지는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이었는데, 이름을 갖게 된 순간 그것이 상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느낌이었다. 부르는 이름이 생기니까 만들어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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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10시부터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정도. 느려도 꾸준히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목표였다.


다행히 요즘은 AI가 코딩을 도와주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말로 설명하면, AI가 그것을 코드로 만들어준다. 혼자서 밤에 만드는 사이드 프로젝트였지만, 마치 옆에 동료 개발자가 한 명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도구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여전히 상상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기능이 있으면 좋을까, 이 화면은 어떻게 보이면 좋을까. 그런 고민들을 하나씩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어갔다. 느리지만 하나씩 만들어가는 성취감이 따라왔다. 어제 없던 페이지가 오늘 생겨 있고, 어제 동작하지 않던 기능이 오늘은 동작한다. 그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쌓여가는 감각이 좋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경험은 생각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넷플릭스와 같은 OTT 볼 시간에 AI 코딩 에이전트와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게 더 재밌다고 했는지 공감이 갔다. Pickify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부족한 것은 나의 상상력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드디어 Pickify의 전체 플로우를 완성했다. 로그인을 하고, 책을 검색하고, 짧은 감상을 쓰고, 저장하면 내 책장에 책 표지가 하나 올라간다. 기능은 아직 부족했고 디자인도 투박했지만, 동작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그 "작은 온라인 책장"이 화면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단하다거나 뿌듯하다는 거창한 감흥보다는, 진짜로 되는구나 하는 신기함에 가까웠다. 매일 밤 한두 시간씩, 느리지만 꾸준히 쌓아온 것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나타났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그날 밤의 피로는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서비스. 사용자는 나 한 명뿐이고, 책장에 꽂힌 책들도 전부 테스트로 넣어본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만의 책장이 생겼다.


독립 서점 거리의 온라인 버전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이름을 갖고, 화면을 갖고, 동작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첫 번째 서점의 문은 열린 셈이었다.


그 서점의 이름은 Pickify. 내 취향을 고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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