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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Jun 28. 2021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주세요

'O린이'라는 말에 대한 시선

초보엄마는 자녀 양육 성공담, 시기별 구체적인 양육법, 날 것 그대로의 경험담 등 닥치는 대로 봤다. 낳긴 했는데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엄마는 뭐라도 표지판 삼아 달려가고 싶었으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표준 지침대로 하는 게 능사는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을 텐데, 육아 콘텐츠는 엄마의 속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 무수한 개별적인 욕망을 모두 보듬는 육아 콘텐츠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대신 광활하고 넓은 육아 콘텐츠의 바다에서도 공통적인 메시지 하나쯤은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국민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님도, 유아 교육의 선구자 마리아 몬테소리님도, 사교육 없이 영재를 만든 푸름이아빠도 입을 모아 말한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이 공통의 진리는 초보 엄마에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아이가 밥을 손으로 조물락거리며 던진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아니 내가 밤잠도 줄여가며 만든 걸 갖고 장난을 치다니, 지금 싸우자는 건가, 덤벼라 작은 인간! 바로 이 순간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시전할 타이밍이다.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심호흡을 가다듬은 뒤 레드썬을 읊조려 본다.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콩나물, 기다란 몸뚱이에 노란 머리가 달린 이 신기한 물체를 요모조모 탐색해 보고 싶을 것이다. 입에 넣어 맛도 보고 조물조물 만져도 보고 뚝 떨어뜨려 뉴턴처럼 실험도 해보고 싶을 것이다. 

대략 이런 마음으로 살면 아이를 대할 때 눈살 찌푸릴 일이 반으로 줄어든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면서 아이의 행동에 대한 허용 범위가 넓어진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자면 세상을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진다.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란. 내가 만약 어린이라면 감사일기는 개뿔, 매일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을 늘어놓은 ‘불만일기’를 몇 권이고 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어린이에겐 불편함 투성이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 보면 거슬리는 게 한 둘이 아니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특정 분야에 초보자나 입문자, 어리숙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호칭 '-린이'다.

최근 ‘주린이’, ‘요린이’, ‘부린이’처럼 업계를 막론하고 ‘-린이’를 붙인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엔 어린이가 미숙하고 모자란 존재라는 차별적인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 

그럼 실제로 어린이는 어떤 분야에서나 다 초보인가? 경험상 꼭 그렇지도 않다.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전문가 중 한 명은 2008년생이다. 올해 13세가 된 전이수 군 은 이미 7권의 저서와 여러 차례의 전시 경험이 있는 동화 작가다. 대한민국 영재들의 일상을 담아낸 프로그램 <영재 발굴단>에 나온 선풍기 박사, 체스 박사, 자동차 박사를 비롯한 어린이 척척박사들은 또 어떻고.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놀이터에서 알게된 한 어린이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우리 아이와 시소를 같이 탄 이후 늘 먼저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동생 앞에서 여보란 듯이 놀이기구 시범을 보여주며 굳이, 새삼, 저는 4학년임을 밝히는 귀여운 면모를 뽐내기도 한다. 알고 보면 어린이들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고 체면을 지키고 싶어한다. 키는 어른보다 작아도 엄연히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적인 한 명의 사람이다. 


물론 ‘-린이’라는 말을 비하하는 의도를 갖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다. 그래서 차별적 용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혐오나 차별 표현이라고 하면 특정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분노하기 마련인데 어린이들 측(?)에선 거의 없거나 미미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어서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고 싶어하는 어린들이 ‘-린이’라는 말을 듣고 지을 표정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워진다. 어른의 마음이 편치 못한 일이 어린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가 없다. 


‘어린이’는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를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만들고 보급한 호칭이다. 말의 유래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더욱 부끄럽다. 그전까지는 어린이들은 전통사회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해 어린녀석, 아들놈, 딸년, 심지어 애새끼라는 호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어린이의 인격은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하대하면서 어른들의 종속물로만 여겼던 것이다. 어린 사람을 하대하던 관습을 뿌리 뽑고자 ‘어린이’라는 호칭을 널리 보급했는데, 그 호칭이 또 다른 하대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마침 내년이 어린이날 100주년이라고 한다. 앞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린 어른들이,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고쳐나가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전환점이 되기를. 그런 무거운 마음가짐으로 지난 5월의 달력을 넘겼다. 내년에는 좀 더 가볍게 넘길 수 있기를 바란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말, 어린이날 선언문 中

△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 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 대우주의 뇌 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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