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다녀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정신없이 일을 쳐낸다. 왜냐하면 나는 3시 30분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워킹맘이기 때문이다. 매일 쫓기는 기분으로 살지만 그래도 늘 하늘이 무심하기만 한 건 아니다.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워킹맘에게도 선물 같은 휴식시간을 주어진다. 일이 일사천리로 샤삭 진행되어 일을 다 끝냈는데 1시간도 넘게 남았을 때, 디자이너나 클라이언트가 웬일인지 피드백이 없을 때다.
이렇게 다디단, 귀한 시간엔 좋아하는 커피잔에 커피를 내려 마신다. 오늘은 파리 방브 벼룩시장에서 샀던 리모주 커피잔을 꺼냈다. 터질 듯 말듯한 분홍색 꽃망울과 입이 닿는 부분에 그려진 반짝이는 골드라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 커피 한잔으로 나는, 그 낯설고 신기한 파리의 벼룩시장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때 지갑을 한참 만지작거리며 이걸 사? 말어? 고민했던 것도 생생하다. 에라 모르겠다! 덜컥 사서는 숙소로 돌아오며 투스텝을 밟았던 기억도. 해외여행이 자유롭던 코로나 이전의 시대엔 틈만 나면 항공권 예약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물론 혼자였던 시절이었다. 이번엔 어디를 떠나볼까. 어떤 경험을 하러 갈까, 무엇을 먹으러 갈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예쁜 그릇과 잔들에 담아내 먹는 것을 즐겼던 터라 여행지에선 꼭 그릇가게에 들렸다. 버릇처럼 마음에 드는 그릇이나 컵 한두 개씩은 꼭 사 왔었다. 여행마니아 아가씨가 바다 건너 모셔온 이 그릇들은, 이제 코로나 시대 어느 워킹맘의 집에서 상상여행의 매개체로써 빛을 발하는 중이다.
지난 2월부터는 또 다른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 9시 육퇴 이후 에세이 한편을 써 내려간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 나는 내 생각을 들여다보러 가깝고도 먼 여행을 떠난다.
좋은 글, 멋진 글,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한 편의 글을 마무리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오랜 시간 남의 말만 전하는 일을 해와서인지 내 이야기를 꺼내 보이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마음속에 깊이 묻어둔 감정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누군가에게 표현하는 것, 남들은 잘만하던데 왜 그렇게 안 되는지. 왜 여태껏 안 하고 살았는지.
그러다 요즘 까만 펜으로 마음속 숲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다. 이것저것 들춰보고 들여다보니 내 뺨을 때리고 지나간 불확실하고 애매한 휘발성 감정들, 곧 사라져 버릴 생각의 파편들, 메모장에만 남아있던 아이디어 조각들이 점점 또렷해져 간다. 쓰다 보니 표현은 어려워도 닿지 못할 곳은 없었다. 언제라도 글을 쓰며 나에게 들어갈 수 있었다. 휘젓고 들여다 보고 다시 정리하고 펼쳐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나, 생활과 육아에 지쳐 취향을 잊고 살고 있진 않나, 어떤 인간인가’를 조금씩 알아간다.
과거 여행지의 나를 소환해 가슴 설레하고, 오늘을 사는 나를 휘젓고 다니며 토닥이기도 하는 여행.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붙잡는 이 여행이 미래의 나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에 쓰일 에너지를 전달해 주길 바라며, 어쨌든 오늘도 여행 잘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