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부활
사생아는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은 아이를 총칭한다. 사생아는 생물학적 부모에 의해 버림받은 육체적 사생아도 있지만 더 심각한 사생아는 영적 사생아다.
키에르케골은 자신의 조국인 덴마크를 기독교 사생아 국가라고 비난해서 그당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키에르케골이 살던 당시 덴마크가 기독교 국가여서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임에도 교회의 규율에 갇혀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돌보라"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웃과 자신을 기독교 사생아로 방치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의 계율대로 사는 것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되어감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자신이 기독교 사생아인지 아닌지는 성직자나 목회자나 신도들이 아니라 "신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 계율은 당연히 지켜야하지만 교회와 성도의 압력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 긍휼감을 가지고 환대하고 있고 이 환대를 확장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지가 신실한 신앙인의 충분조건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제외한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충분조건을 실현하는 행동을 "신 앞에선 단독자"라고 규정했다.
키에르케골은 기독교 사생아로서 삶은 "구원의 확신"을 "구원받음"과 동일시할 때 시작된다고 경고한다. 교인으로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은 남을 통한 구원의 확신일 뿐이지 하나님이 판단하는 구원은 아니라고 규정한다.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는 성직나나 목회자나 신도가 아닌 하나님만과 자신만이 아는 사실이다. 또한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는 세상에 개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정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죽음의 직전까지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고통과 죄를 극복해가며 마지막 순간까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골은 개입이 끝나는 죽음이 직면하기까지 더 신실한 자신으로 만드는 Becoming하는 삶만이 자신을 영적 사생아로 방치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키에르케골은 탄생과 부활을 구별한다. 예수를 처음으로 영접하는 것은 탄생이지만 새롭게 탄생한 자신을 사생아로 방치하지 않고 삶의 장면이 변화할 때마다 여기에 갇히지 않게 지속적으로 부활시켜야 한다고 본다. 부활의 본질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믿음에 생명을 주는 믿음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한번의 탄생과 죽을 때까지의 N번의 부활을 감행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영적 사생아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마지막 부활은 세상에 대한 개입이 끝나는 순간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 자신이 영적 사생아의 삶을 극복했는지의 문제다. 육신의 몸을 벗고 영적 사생아 상태를 극복해 키워낸 자신에 대한 기억을 온전하게 유산(Inheritance)으로 남길 수 있는지의 문제다. 내가 남긴 유산은 후세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씨줄에 날줄로 다시 부활한다. 예수가 우리 몸을 통해 부활했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로서 몸이 세상을 떠났어도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소중한 기억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 진정한 부활이다.
키에르케골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복음을 심은 시작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지 마지막 정산의 단계인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이 씨앗을 자신의 몸을 통해 길러내서 세상에 개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큰 나무로 길러내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확인받고 정산하는 문제라고 규정한다. 죽음의 순간까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잘못과 죄와 고통을 극복하는 되어감 Becoming만이 남는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죄의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한 것이 상징하는 바도 자신의 피붙이가 주는 생물학적 몸을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몸에 잉태하기로 작정한 것이지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사도바울이 회심한 것도 자신의 몸 속에 예수를 씨앗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이지 그자체로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회심 후 사도바울은 매일 죽는 육신의 죽음과 믿음의 부활을 반복해가며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향유하는기독교 초석을 유산으로 남겼다.
키에르케골은 새로운 탄생과 N번의 부활과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서의 정산결과를 통보 받는 영원한 부활을 통해 스스로의 몸으로 체험되지 않은 신앙은 진실된 신앙이라고 보지 않았다.
니체도 사람들은 "목적을 잃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짓에 몰두한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잃은 순간 누구나 영적 사생아가 되는 삶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수의 탄신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예수의 탄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 몸 속에 부활시켜 나의 고유함으로 키워가고 있는지 아니면 영적 사생아로 방치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