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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호수 Mar 24. 2021

내가사이드 허슬을시작한 이유

시작할 땐 사이드 허슬이 뭔지도 몰랐다.

일을 하고 싶었다. 가사노동이 아니라 나의 일.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애 엄마라서, 누구의 부인이라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을.


이따 장 봐야지. 빨래도 돌리고. 애들 학원도 좀 알아봐야지. 얘가 숙제는 잘해가고 있나? 이번 달 카드값이 얼마나 나왔으려나? 애들 학원비랑 생활비가 좀 많이 나온 것 같은데. 등등


주부의 생활은 바쁘다. 동시에 지루하다. 변하지 않는 일거리, 변하지 않는 고민 주제. 물론 아이가 자라면서 고민의 구체적인 주제는 달라질 수 있지만 본질은 “육아”와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나”란 존재는 어떻게 증명받을 수 있을까?


거창한 자아실현 따위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나만의 공간과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것처럼 나만의 영역을 갖고 싶었다. 물론 내 친구들, 나의 친정식구들이라는 사적인 영역에 나만의 공간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보다는 공적인 영역이 존중받는 세상 속에서, 돌봄과 육아라는 사랑의 실천은 감히 “돈”이 되지 못하는 고귀한 부분이기에 사적인 영역에 있어야만 하는 이 아이러니한 시스템 속에서 나도 존중받고 싶었다.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엄마이자 주부인 나는 왜 존중받지 못할까? 바로 내가 종사하는 영역은 사적인 영역에만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없기에. 내가 하는 약속은 노는 약속이었고, 소모적인 것이었다. 출근하는 남편은 돈 벌러 가는 중요한 일이고, 학교 가는 아이들도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친구들을 만나는 건 그 만남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팔자 좋은 아줌마들의 수다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솔직해 지자. 더 솔직해지자. 돈을 벌고 싶었다. 소위 말해서 영끌해서 집을 마련하고 나니 대출이자가 무서웠고, 노후생활이 걱정이 되었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교육비도 걱정이 되었다. 40줄에 들어선 경단녀의 종착역은 마트 캐셔라는 농담은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의 직업은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고, 늘 공급이 부족했기에 의지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업이 속한 서비스 영역의 급여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 차마 돈으로 보상을 바라면 안 되는 돌봄과 사랑에 관련된 서비스였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육아비용과 내가 벌어들이는 월급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차이가 유의미하게 크지 않다면,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죄책감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면, 더 이상 일을 지속할 동기가 없었다. 공급이 부족한 이유는 바로 이런 탓이 크리라. 쉽게 그만두고, 쉽게 구하고. 결국 비숙련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구조가 되고, 겉으로 서비스의 질적인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기에 급여도 하향 평준화되기 쉬운 영역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직업을 버리고, 16년 차 가정주부의 삶을 살았다. 중간에 잠깐씩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의 주업은 가정주부였다. 아이들은 제법 자라서 이제 제 앞가림은 할 나이가 되었고, 나는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베테랑 경력직원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였다.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 돈을 벌고 싶었고, 그걸로 내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기본급 없이 일한 시간만큼 시급으로 계산이 되었고, 시급은 센 편이지만 일반 직장인처럼 일 6시간이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하루 종일 한 두 시간만 일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프리랜서였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새로운 직업을 갖기도 어려웠다. 주변 친구들 중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개중에는 로스쿨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는데, 세상에 그 어려운 공부를 하고 나와도 취직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 성공적인 경우는 치과대학원을 나온 친구였다. 당연히 나는 능력도, 그런 용기도 없었다. 


또 다른 친구는 국가에서 경단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참여했는데, 코딩과 3D 컴퓨터 강사였다. 친구의 아이는 아직도 유치원, 초등학생이었는데, 교육시간은 오후 5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애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경단녀를 위한 교육이라더니 시간이 왜 저따위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다행히도 교육받는 6개월간 매일 저녁 4시간씩을 가까이 사시는 시어머니께서 맡아주셨다. 교육을 마치고 그 친구는 방과 후 강사나 어디 하루짜리 캠프 강사 등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나는 내 자격증으로도 그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미적거리기만 했다.

 

이제 그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할 수 있지만 이제 한창 일하는 30대 상사가 한참 놀다 온 40대 직원을 부리고 싶지는 않겠지. 다시 공부하는 건 돈도 너무 많이 들고 자신이 없어. 로스쿨 나와도 백수잖아? 그런 돈 낭비, 에너지 낭비를 할 수는 없잖아?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한 결론처럼 느껴졌다. 


저 친구는 시어머니가 애를 봐줬으니까 했지. 저 친구는 친정이 잘 사니까 대학원비를 대줬을 거야. 저 친구는 애가 하나니까 할만하겠지.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나보다 어떤 좋은 조건을 가졌나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나는 하고 싶은데, 상황이 도와주지 않아. 그러니 나는 피해자이고 불행해. 주부의 삶이란 가족들을 위해 희생만 하고 인정도 못 받는구나. 왜 그때 끝까지 버티지 못했을까. 내가 이런 생각하며 우울할 때가 아니지. 애 좋은 대학 보내려면 엄마가 정보가 빨라야 한다는데 미리미리 대학입시에 대해서 공부하고 애 학원도 알아봐야지.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이유는 끝도 없이 많았다.


과연 나는 내 일을 하고 싶은 것이 맞을까?


나는 첫 애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둔 것이 두고두고 힘들었고, 예민했던 큰 아이의 육아가 많이 버거웠다. 그래서 친정엄마에게 애를 맡기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둘째가 생기면서 다시 그만두었다. 내 맘대로 내 계획대로 살다가 아이의 욕구와 스케줄에 맞춰서 사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고, 그건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과도 같았다. 그렇게 육아를 버티고 나니 어느새 그게 나 자신이 되어있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해졌다. 내 스케줄보다는 아이의 스케줄에 맞추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기본적인 것부터 나의 시간을 내 뜻대로 쓰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스케줄에 맞게 여유 있는 내가 조절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고, 그렇게 사는 게 내 마음도 편하고, 가족들도 편하고 모두가 편했다. 그 시간이 무려 13년이었다. 어쩌면 내가 성인이 되어서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이었다.


나는 출산 전의 자유롭게 내 삶을 계획했던 그 추억만 간직하고 있을 뿐, 그 능력은 이미 상실한 지 오래였고,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끝없이 합리화하고 핑계 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자기 합리화, 자기 방어는 내가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방패막이었다. 실제로 꼭 필요하기도 하다. 육아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이 와중에 내 욕구를 들이밀었다가는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거나, 욕심부리다 과로사하거나, 최악은 아이가 미워져 학대나 방임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언제 벗어나야 할지 이 몸과 마음이 알지를 못하더라. 육아는 끝없는 내려놓음이라고 했던가. 내 몸의 일부였던, 내 뱃속에 넣어 24시간을 품고 있던 아이를 밖으로 내어놓고, 24시간을 옆에서 지켜보던 신생아기에서, 먹을 것을 나눠먹는 수유기에서 이제 다른 음식을 해먹이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고, 끝없이 멀어져 가는 과정이 육아라 한다. 대단한 경험이다.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내 몸에서 생겨나 한 몸처럼 붙어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주장하고 순식간에 내 삶을 지배하더니, 이제 거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려 하니 이제는 그만 놓아주고 나는 이전의 내 삶을 되찾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내 삶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와 이제는 익숙해진 이 생활에 안주하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그런데 이 생활에 안주하고 싶다는 욕구는 요망하게도 솔직하게 그 욕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나는 상황이 받쳐주질 않잖아, 이게 최선이야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내 탓이 아니라고,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내 마음을 속였다. 불편해하지 말라고, 지금 내 생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라고 짐짓 훌륭한 인격자 인양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답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안주하는 것은 내가 원했던 삶은 아니라고. 이대로 포기하고 안주하는 것은 싫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내 안의 억눌려왔던 욕구들은 때론 분노로, 때론 우울감으로, 때론 포기와 함께 신나게 놀아보자는 방탕 주의로, 다양한 형태로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래서 사춘기보다 갱년기가 더 무섭다 했던가. 


내가 하도 우울해하니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자기도 한참 그랬다면서 그게 갱년기 초기 증상이라며 갱년기 증상 개선에 도움을 주는 비타민제를 주기도 했다.


이거 하루에 한 알씩 먹어봐. 불쑥불쑥 화나는 거 좀 괜찮아질 거야. 이거 먹는데도 남편 볼 때 신경질 날 수 있거든?
그럼 어떡해요?
두 개 먹어

그 언니에게는 중학생 딸이 있었는데, 언니가 무언가로 막 화를 내면 딸아이가 묻는단다.

엄마 오늘 그 약 먹었어?



그런 날은 생각해보면 그 약을 안 먹었더라고, 효과 있으니 꼭 먹어보란다.

언니 말대로 약을 사다 먹으니 플라세보 효과인지 반짝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이 시기는 “다 됐고 현재를 즐기자!” 상태였는지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우울할 새도 없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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