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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Sep 30. 2023

<환상의 빛(幻の光, Maboroshi)>(1995)

미야모토 테루의 원작과의 차이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독 데뷔작으로,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했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1회 초 첫 타석에서 솔로 홈런을 터뜨린 셈이다.


<환상의 빛>이 개봉한 1995년은 일본이 전환점이 맞이한 해다. 1995년 1월 17일 고베대지진이 발생해 6500여 명이 희생되었다.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이 있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고베대지진이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었다.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3월 20일,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가스를 뿌려 14명이 사망했다. 사이비종교에 의해 수도 도쿄의 지하철이 테러를 당했다는 점에서 훗날의 9.11 테러와 같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고레에다의 <디스턴스>(2001)는 이 옴진리교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어졌다. 버블 경제의 붕괴가 가시화되어 가던 일본 사회에 고베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은 일본의 몰락을 예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결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총리는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였는데, 태평양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환상의 빛>과는 무관하다. 1995년 9월에 개봉했으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고, 고베대지진과 옴진리교를 예측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우연의 일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영화는 어린 시절의 유미코가 집을 나간 할머니를 쫓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유미코는 할머니를 말리지만, 시코쿠의 고향집으로 간다는 할머니는 그대로 실종된다. 할머니의 실종은 유미코의 죄책감으로 두고두고 남게 된다.


성인이 된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는 남편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분)와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쿠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철도를 거슬러 올라가 자살해 버린다. 어린 아들 유이치와 함께 남겨진 유미코는 절망에 빠진다.


시간이 흘러 유이치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유미코는 와지마(輪島)의 바다 마을에 사는 다미오(나이토 다카시)와 재혼하게 된다. 아내와 사별한 다미오는 유이치와 비슷한 나이의 딸 토모코, 나이든 아버지(에모토 아키라)와 함께 산다. 


여기서 유미코의 고향인 아마가사키(尼崎)와 재혼해서 이사한 와지마의 지리적 관계에 대해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마가사키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효고현에 있지만,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는 오사카로 분류될 정도로 사실상 오사카의 일부라 할 수 있다. 한때 공장의 도시라 불렸다고 하는데, 이쿠오 역시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에 와지마는 오사카에서 훨씬 북쪽에 있는 이시카와(石川)현에 있다. 이시카와현에서도 와지마는 현청 소재지인 가나자와보다도 북쪽에 있는 도시이고, 다미오 일가가 사는 바다 마을은 와지마에서도 떨어진 시골이다. 아마가사키와 비교해서 와지마가 시골이라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 다미오와 유미코의 대화에서도 언급된다.


파도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는 와지마의 바다 마을은 불온함을 고조시킨다. 재혼한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지는 아닐까? 시아버지가 유미코와 유이치를 못마땅하게 여겨 괴롭히지는 않을까? 타지에서 온 유미코를 마을 사람들이 따돌리지는 않을까? 그러한 예상과 달리 유미코와 유이치는 새 가족들과 금세 친해지고,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남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아마가사키로 잠시 돌아간 유미코는 이쿠오가 자살하기 직전 집 근처까지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잊어가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유미코는 다시 고통에 빠지게 된다. 집을 나온 유미코는 장례 행렬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가게 된다. 유미코가 바닷가에서 화장을 목격하고 응어리가 해소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데뷔작에 나타난 부재와 상실이라는 주제는 이후로도 고레에다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가까운 사람들을 사고나 자살로 떠나보낸 이들은 영원히 "만약에"라는 정답을 알 수 없는 물음 속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할머니와 남편을 떠나보낸 유미코 역시 그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새 가족과의 만남으로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환상의 빛>은 미야모토 테루(宮本輝)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내가 알기로 고레에다의 영화 중에 원래 원작이 있는 작품은 이 <환상의 빛>과 <바닷마을 다이어리>(요시다 아키미의 만화)뿐이다.


미야마토 테루는 1947년 고베에서 태어나 1977년 작가로 데뷔한 뒤, 1978년 <반딧불 강>으로 7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일본 문단에서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오사카, 고베 일대를 배경으로 한 지역성이 그의 작품 세계의 중요한 요소인데, 아마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환상의 빛> 역시 그렇다. <환상의 빛>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1978년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은 한국에도 다수 번역돼 있는데, <환상의 빛> 역시 2014년 바다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미야모토의 소설은 죽은 남편에 대한 유미코의 독백으로만 전개된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기본적으로 원작 소설과 같다. 그러나 유미코의 성격에 대해 받는 인상은 다르다.


영화에서의 유미코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슬며시 띤 미소로 감정 표현을 한다. 첫 남편 이쿠오가 죽은 후에는 어딘가 삶에 대해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가 난다. 반면에 원작 소설은 유미코의 독백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영화보다 유미코의 감정이 직접 전해진다. 죽은 남편에게 말을 하는 유미코의 독백은 과묵한 영화 속의 유미코와는 정반대로 수다스럽게까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영화의 유미코와 달리 소설 속의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았음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이 인상 깊다.


원작 소설과 영화 사이에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한씨 아줌마가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유미코가 아들과 함께 재혼하기 위해 아마가사키에서 와지마로 출발하던 날, 재일조선인 한씨 아줌마를 만난다.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한씨 아줌마는 조선인이었고, 여자면서도 남자처럼 머리를 깎고, 남자용 작업복을 입었어요. 혼자서 트럭을 운전해서 폐품을 회수하는 사람이었죠. 실제로는 서른여덟 살이었는데도 마흔예닐곱 살로 보이는 빨간 볼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아줌마였어요. (중략) 평소에는 무뚝뚝했는데 그날따라 제 얼굴을 보고는 다가와서 "꼭두새벽부터 어디 가?"라고 물었어요. [1]


한씨 아줌마는 소설 중반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중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도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 특히 재일조선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레에다가 영화에서 한씨 아줌마의 존재를 생략한 것도 이해는 된다.


어쨌든 한씨 아줌마는 와지마로 출발하는 당일까지 재혼을 망설이던 유미코가 와지마로 출발하게끔 만드는 인물이다.


저는 전철 안에서 오사카에 도착하면 다시 아마가사키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메다에 도착했을 때, 한씨 아줌마가 배웅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일찍 나와서 시간이 남아. 너무 사양하지 마. 앞으로 평생 못 만날 거잖아."[2]


결국 한씨 아줌마의 배웅을 받은 유미코는 와지마로 출발해서 새로운 가정을 찾게 된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남편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유미코와 재일조선인인 한씨 아줌마 사이에서 나타난 도시 하층민 여성들의 연대는 원작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이다.


그런데 이 한씨 아줌마의 존재가 영화에서는 생략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유미코가 친정어머니와 헤어진 뒤, 아들과 기차에 타는 장면만 나올 뿐이다. 물론 고레에다가 혐한이라서 재일조선인 캐릭터를 생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레에다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인 1992년 재일조선인의 차별을 다룬 TV 다큐멘터리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를 찍었다. 2009년에는 배두나를 주연으로 한 영화 <공기인형>을 찍었고, 최근에도 한국 배우들과 <브로커>를 찍은 바 있다. 


그렇다면 왜 한씨 아줌마의 존재를 생략하게 된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재일조선인이라는 배경을 가진 캐릭터를 중간에 갑자기 등장시키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추측컨대 고레에다는 사회적 문제를 배제한 순수한 영화를 만들려고 의식했던 것이 아닐까? <환상의 빛>의 원작에서는 한씨 아줌마의 존재 외에도 유미코가 빈곤 때문에 겪은 차별도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유미코의 아버지가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부분 역시 생략되었다.


<환상의 빛>은 타이완의 허우샤오센(候孝賢) 감독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TV 프로그램을 찍던 시절의 고레에다는 빈곤과 복지 등 사회적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환상의 빛>이 개봉한 뒤, 고레에다는 허우샤오센으로부터 원래 다큐멘터리적 문법을 활용한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말을 듣는다. 


그다음 작품인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이용했고, 옴진리교 사건을 다룬 <디스턴스>부터는 고레에다의 사회파적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후부터는 허우샤오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고레에다 스타일을 완성해 나가게 된 것이다.


[1] 宮本輝(1983)『幻の光』新潮社、p.39. 번역은 필자.

[2] 앞의 책, p.41. 번역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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