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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Nov 11. 2023

<디스턴스(Distance, 2001)>

이동진 평론가는 고레에다의 여덟 번째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을 평가하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짝수번째 영화는 전부 걸작"이라는 한줄평을 남겼다. 이후 고레에다의 홀수번째 영화와 짝수번째 영화 징크스가 회자되었다. 데뷔작인 <환상의 빛>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 번째 영화인 <디스턴스>보다는 네 번째 영화인 <아무도 모른다>가, 다섯 번째 영화인 <하나>보다는 여섯 번째 영화인 <걸어도 걸어도>가, 일곱 번째 영화인 <공기인형>보다는 여덟 번째 영화인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디스턴스>는 고레에다의 영화 중에서는 가장 덜 알려진 영화다. 고레에다의 팬층이 두터워지면서 데뷔작인 <환상의 빛>을 비롯해 초기작들이 재개봉했지만, <디스턴스>는 고레에다의 팬 중에서도 어지간한 마니아가 아니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사실은 필자 역시 이번에 처음 봤다).


<디스턴스>는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가 일으킨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1984년 아사하라 쇼코가 만든 옴진리교가 일으킨 이 사건은 도쿄의 지하철에 사린을 살포해 14명이 사망했다.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무차별 테러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를 예고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2001년은 <디스턴스>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디스턴스>에서는 진리의 방주라는 사이비종교 단체가 수돗물에 바이러스를 풀어 128명이 사망했고, 범인들은 교단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설정돼 있다. 옴진리교 사건의 범인들은 체포되거나 도주했지만, 옴진리교 사건이 모티프임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기일, 범인의 가족들은 기일에 모여 범행 현장인 산속의 호수를 찾는다. 부인을 잃은 아츠시(이우라 아라타 분), 남편을 잃은 키요카(나츠카와 유이 분), 형을 잃은 쇼(이세야 유스케 분), 전 부인을 잃은 마코토(테라시마 스스무 분)는 범행 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사건과는 관계없는 잡담을 나누며 웃고 떠든다. 호수에서 죽은 가족들의 명복을 빌고 돌아가려던 그들은 타고 온 차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도둑맞은 것이다. 외딴 산속이라 걸어서 하산할 수도 없고, 도쿄로 돌아갈 길이 막혀 공포에 빠진 그들의 앞에 사카타(아사노 다다노부 분)가 나타난다.


사카타는 진리의 방주 교단의 잔당이었다. 아츠시 일행에게 진리의 방주는 가족들을 빼앗아가 죽게 만든 원흉이다. 일행은 진리의 방주의 잔당인 사카타에 대해 적의를 드러내지만, 어쩔 수 없이 사카타가 사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교단과 죽은 가족들, 그들이 일으킨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전철을 타고 도쿄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사건 이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상과 같은 시놉시스를 보고 기대했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고레에다의 영화는 역시 짝수번째 영화가 낫다.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되지만, 지루하다. 테러 사건 자체는 영화에서는 다뤄지지 않고, 차를 도둑맞은 것을 제외하면 극적인 사건은 없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영화의 핵심적 부분인데, 최대한 현실의 대화에 가깝게 만든 탓인지, 재미가 부족하고 지루하다.


2022년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연설 도중에 암살당했다. 그리고 범인의 동기가 아베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통일교에 대한 원한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에서 통일교를 비롯한 신흥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일본 사회에서 이렇게 큰 화제가 된 것은 옴진리교 사건 이후의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이비 종교를 다룬 작품들이 만들어지거나 재조명되는 일도 많아졌다.


옴진리교 사건에 대해서는 모리 타츠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A(1998)>와 그 속편 <A2(2001)>가 유명하다. 당시 과열되었던 언론 보도는 옴진리교 신자를 악마로 그렸지만, 모리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드러난 옴진리교 신자들은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디스턴스>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만, 다큐멘터리인 <A>가 더 설득력 있게 와닿는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도 다큐멘터리인 <A>가 훨씬 덜 지루하다.)


극영화 중에서는 <별의 아이>가 훌륭하다. 사이비 종교 가정에서 자란 치히로(아시다 마나 분)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가족과 사회, 종교 사이에서 고뇌하는 내용의 영화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가족을 버릴 수 없기에 발생하는 고뇌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디스턴스>는 다큐멘터리로서도, 극영화로서도 애매한 지점에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위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디스턴스>의 가장 큰 문제는 설정과 스토리 전개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데 있다. 추모를 위해 범행 현장을 찾은 일행이 어쩔 수 없이 사카타와 하룻밤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타고 온 차를 도난당한 사건이다. 그런데 차가 없어진 장소는 도무지 사람이 지나다닐 것 같지 않은 산속이다. 그런 곳에서 굳이 차를 훔쳤다는 스토리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설정에 있어 작위적인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가족들이 테러 사건과 동시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실제 옴진리교 사건의 범인 중 일부는 십여 년에 거쳐 도주했었다는 사실과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범인들이 살아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범인들을 여전히 가족으로서 받아들일지, 관계없는 인물들로 부정할지의 결정적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가해자 가족으로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범인들을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회피한다. 죽은 범인들은 온전히 과거의 기억 속 존재이기에 현실의 날카로운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기에 영화의 주제의식이 더 명확해진 측면은 있다. 그렇지만 현실 속의 갈등을 회피한 작위적 설정이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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