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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Mar 18. 2024

철거된 군마현 조선인 추도비

일본 사회 우경화의 현주소

군마(群馬) 현 다카사키(高崎)는 JR 다카사키선 종점이다. 신주쿠나 이케부쿠로에서 북쪽으로 가는 전철을 타면 사이타마현을 통과해서 다카사키에 도착한다. 나 역시 몇 번 가 본 적이 있어서 낯익은 도시다.


그런 다카사키시에 위치한 현립 공원 '군마의 숲(群馬の森)'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작년이었다.


[현장] 위기의 ‘조선인 추도비’…“한일 우호 20년 상징물 왜 없애나” (daum.net)(한겨레 기사)


일제시대에 식민지 조선에서 동원되어 노역 중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군마현은 자민당의 보수 정치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가가 삼대째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는 텃밭이기도 해서 원래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일본의 시민단체와 재일 한국인들이 추도비 건설을 추진했다. 현의회에서는 자민당 의원을 비롯해 만장일치로 현립 공원에 추도비 설치를 찬성했고, 제막식에는 당시 현지사가 참석해서 축사를 읽기도 했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우경화가 심해지고 혐한 열풍이 불면서 추도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 단체들이 군마현에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마현의회의 보수 정치인들은 추도비의 추모 행사를 정치 행사로 규정하고, 현립 공원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허가 취소 결정을 내렸다. 이에 추도비 건립을 추진한 시민단체가 군마현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8년에 걸친 법정 투쟁이 벌어졌다.


2022년, 최종적으로 군마현이 최고재판소에서 승소했고, 자민당 국회의원 출신의 군마현 지사 야마모토 이치타(山本一太)가 철거 명령을 내렸다. 야마모토 지사는 추도비의 내용에는 이론이 없다면서도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했다.


일련의 논란을 알게 된 작년 12월, 나는 '군마의 숲'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했다.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2시간, 다카사키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현립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 도착해서 당황스러웠던 점은 추도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큰 논란이 될 정도라면 공원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있거나 최소한 표시라도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없어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평온한 현립 공원

추도비는 공원 입구에서 5분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나 외에 사람도 없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추도비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다.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글귀가 새겨진 추도비가 이렇게 논란의 대상이 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추도비 주변의 풍경
공원 내의 현립 근대미술관

공원에는 군마현립 근대미술관이 있어서 들렀다가, 도쿄로 돌아왔다.



해가 바뀌고 난 올해 1월,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시민단체가 철거를 명령한 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마현이 대집행(代執行, 행정관청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자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 행정관청이 대신 집행하는 행위)에 나섰다.


1월 29일 시작된 철거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2월 2일에는 아사히신문의 헬기 취재로 추도비가 산산조각이 난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철거 작업이 완료된 뒤, 2월 중순에 공원은 다시 공개되었다. 학기말이라 바빠서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모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빨리 추도비가 철거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법원 판결과 군마현의 철거 명령이 있더라도 논란이 계속될 뿐, 실제로 철거 작업은 지지부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사회의 양식을 믿고 있었다. 우익 단체, 군마현의회, 군마현 지사, 사법부의 합작으로 이뤄진 추도비 철거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다카사키에 이런 추도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국인은 물론 대부분의 일본인들 역시 20년간 추도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군마현에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현립 공원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 추도비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추도비를 철거함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대대적으로 뉴스로 다뤄졌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추도비를 철거한다고 해서 추도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추도비를 철거했다는 사실이 추가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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