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2020년 2월 17일 오전 서울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인간보다 거대한 뭔가 지구라는 스노볼을 들고 상하좌우 신나게 흔들면 이런 꼴일까. 외출 전 인스타그램을 켜니 사방에서 눈의 낭만성을 인증하고 있기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눈발이 거셀 줄이야. 겨울 끝자락, 무언가 해소하듯 쏟아내던 하늘의 변덕은 적어도 나를 둘러싼 SNS에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나 보다. 물론 내가 포착하지 못하거나 외면한 지점에서 누군가는 눈 때문에 불편해진 길에 대해 불평하거나,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이 자신의 가게로 찾아오지 않는 것 아닐까,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을까 걱정하거나, 눈과 함께 알려지는 누군가의 근황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도 있겠지.
오쓰카 에이지의 <감정화하는 사회>는 ‘감정화’에 기반해 ‘플랫폼’과 ‘노동’, ‘문체’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 작가는 “이성이나 합리가 아니라 감정의 교환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엔진이 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감정’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기피하게 되는, 즉 ‘감정’만이 유일한 관계성으로 통용되는 제도”(p.9)인 ‘감정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관측 가능한 현상을 문학의 문체로 끌고 와 주장과 근거를 전개하는 모습은 이 책을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흥미로웠다. 형편없는 책이 아닌 매력적인 책이기에 인용할 문장을 정리하며 뭔가 마음에 걸렸다. 쉽게 간다면 이 글에서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그의 논지를 정리하는 식으로 가면 그만이지만, 인간이 모든 현상을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은 그의 글에도 놓친 지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어질 문장들은 <감정화하는 사회>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지적하려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쓰카 에이지의 논의에 갇히려는 것 또한 아니다. ‘감정화’를 중심으로 마인드맵을 그렸을 때 수많은 단어가 거미줄 이상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고, 나는 그가 책의 무게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말하지 않았을 지점을 짐작해 써보고 싶을 뿐이다. ‘문체’와 ‘플랫폼’, ‘AI’를 중심으로 좁고 깊게 파고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급’ ‘국가’ 등을 추가해 넓게 퍼지는 이야기가 전개될 텐데,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서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내 무능에 있으며, 무지로 인해 보지 못할 지점이 분명 있을 테니 그건 이걸 끝까지 읽을 누군가 그려보면 좋을 듯싶다.
[감정화]
오쓰카 에이지는 ‘감정화’를 2016년 7월 13일 ‘덴노의 생전 퇴위 의향’에 관한 뉴스의 NHK 등 언론사 ‘유출’에 대한 여론을 예시로 설명한다. 요약하면 일본인을 위해 평생 원하지도 않았던 감정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덴노는 헌법으로 정치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 덴노가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상징 덴노제’ 기능의 문제 가능성과 후계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음에도 여론은 “덴노가 표현한 ‘마음’이 좋았다”에 그친 이야기다. 덴노제가 다소 뜬금없이 느껴진다면 뭘 하더라도 속내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들, 국가 상징의 한 축을 담당하던 인물이 직무 입장에서 의견이 아닌 개인의 ‘마음’이라는 단어로 현 제도를 빙빙 돌려 우려했음에도 그저 좋다는 반응 외에 어떤 논의도 없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작가는 상징 덴노제의 ‘기능’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덴노를 하나의 기관으로 본다는 의사표현이며, 덴노의 표현이 가진 맥락과 적절성, 덴노제 존치 혹은 폐지에 대한 이야기로 전혀 연장되지 않고 ‘감정적 공감’에 그친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으로 오쓰카 에이지는 부연설명을 더하는데(p.14), 감정과 감정이 공감하려면 내면의 관찰자가 중간에서 상대방의 감정 또는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고 그것이 적절한지 판단해 ‘도덕’이라는 기준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감정화하는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빠져있다는 소리다. 박정희 사망 직후 맥락을 따지지 않고 거리에 나와 통곡했던 사람들, 독재자가 대통령을 했으니 독재자의 ‘불쌍한’ 딸도 대통령 한 번 시켜줘야 하지 않겠냐던 말에 공감한 사람들, ‘코로나 19’의 매개체가 됐음에도 ‘피해자’ 입장만을 강조하며 마귀 탓으로 돌리는, 구체적 협조 방안 제시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사이비 종교의 태도 모두 감정화의 사례다. 이성 대신 감정만 작동하는 현상을 1945년 8월 15일 ‘옥음 방송’(2차 세계대전 항복 방송)까지 거슬러 올라가(p.22) ‘너희들이 힘든 걸 알고 있는 내 마음을 이해해달라’는 요지의, 이성과 논리에 기반하지 않은 감정적 공감이 과거에도 있었음을, 신문사와 방송사를 비롯한 기성 언론이 신뢰를 잃은 것 또한 감정화 때문임을 주장하며 일본인이 원숭이로 회귀했다는 그의 말에는 회의감이 짙다.
<감정화하는 사회>는 언론의 감정화를 단편적으로 언급하니 보충하면, 껍데기만 존재하는 정론직필과 기계적 중립에 기반한 신뢰를 등에 업은, 언론사라는 수직적-단방향 플랫폼이 ‘기레기’ ‘먹싸개’라는 멸칭을 들어가며 가짜 뉴스와 왜곡된 프레임 제작을 반복하는 이유는 직무 비중에서 감정 노동이 정보 전달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여전히 시청률과 트래픽, 구독 규모에 기반한 광고수입에 의존한다. 광고주가 원하는 논조를 유지하며 관계를 유지하고, 내면에서 설계한 세상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논리를 상실한, 감정화한 구독자로부터 지속적인 트래픽 창출을 위해 고객의 입맛에 맞춘 프레임의 기사를 생산한다. 악순환에서 벗어나려 해도 오랜 시간 쌓아온 기사가 만들어낸 언론사의 ‘문체’는 변화 시도에 따른 기존 고객층 이탈이라는 가능성과 엮여 개선 여지를 차단한다. 2009년 신문법의 기사형 광고 처벌 조항이 삭제된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현상은 심화되어 지면은 광고 기사와 가짜 뉴스로 채워졌다. 기사형 광고의 경우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Karb)가 적절성을 심사해 경고, 주의, 권고를 언론사에 전달하지만 법 개정 이후 ‘자율’에 맡기기에 누구도 언론사를 막지 못한다. 가짜 뉴스와 규정에서 어긋난 기사형 광고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건 감정화된 언론사 입장에서 수익구조의 붕괴이자 서비스 불가능을 뜻하며,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산업 발전 저해’를 입법 반대 근거로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에 책임은 없다.
본론으로 돌아와 감정화 현상 억제 방법으로 오쓰카 에이지는 <도덕감정론>의 도덕과 더불어 <감정화하는 사회>의 또 다른 핵심인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의 ‘언문일치체’를 제시한다. 말하듯 쓰는 문체를 뜻하는 이것은 글을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널리 쓰이는 문체다. 에세이를 비롯한 자기표현 영역에서 주로 쓰이며, 말하듯 활용하기에 묘사가 적거나 없다. 작가와 야나기타는 언문일치를 타자 간의 소통과 덴노에 의존하지 않는 시민들의 공공성 형성을 위한 도구가 되길 기대했다.(p.43) 문제는 언문일치가 쓰이는 과정에서 기대와 달리 ‘내면화’된 모습으로만 사용됐다. 사회 현실을 비롯한 외부 환경으로부터 단절되어 나의 내면만 바라보는 서술만이 언문일치의 세계에 자리 잡았다. 사적 서술에서의 공적 담론을 멸시하며 문체로 권위를 유지하려는 일부 지식인 엘리트층, 언문일치라는 언어 접근 수단이 있음에도 지적 태만에 자기표현 영역에만 머무르며 공적 영역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작가,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했던 봉건적 사고에 빠진 신민,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 성공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 등 다양한 변수가 있겠지만 오쓰카 에이지의 서술에 따르면 일본은 언문일치를 활용한 공공성 형성에 실패했다.
비판적 사고에 필요한 도덕이 부재한 사회, 집단, 개인의 담론에는 감정 노동만 존재한다. 자신이 공감하고 소비하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상대가 제공하지 않으면 악으로 간주한다. 작가는 일본의 한국과 중국을 향한 적대적 태도를 예로 제시하며(p.48) 타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외국인’이 자국 구성원의 기분에 맞는 언행을 보이는지 판단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덴노와 일본을 경유해 감정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첫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감정에서 벗어나 현실에 자리한 비평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이어지는 글들은 오쓰카 에이지 나름의 사적 언어를 활용한 비평의 실천인데, 국내외 등장하는 사회학 서적 혹은 문학비평서에 비해 쉽게 읽히지만 책 전반에 깔린 회의적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반복해서 읽어보니 오쓰카 에이지가 틀렸다기보다 상황이 다르다. 그는 일본을 바라보고 나는 한국을 응시한다. ‘한국의 십 년 뒤가 일본’이라는 어디서 들어봤을 낡은 명제는 성립하지 않고, 2016년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확실해졌다. 한국에서도 곳곳에서 감정화가 보이지만, 공적 담론에서의 사적 언어 사용에 기반한 공공성의 형성과 확산 또한 관찰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