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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ratives Mar 29. 2020

사적인 이야기(2)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인증의 인정, 갖지 못할 사치]
 사적 언어로부터 만들어지는 공공성을 논하기에 앞서 감정화의 공간적 배경인 플랫폼 이야기를 해야 한다. 후술할 이야기들에 비해 지엽적이지만 2장 ‘이야기 노동론’은 투고 플랫폼의 노동 착취를 다룬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도 무보수 및 플랫폼 콘텐츠 밀도에 기여하는 글이라 해당 논의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잠시 잊자. 오쓰카 에이지는 우리가 소비 자체 혹은 인간의 감정 표현이 노동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기업이나 사회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은 소비를 통해 일시적으로 충족감을 느낄지라도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해 소외된다는 노동 문제, 새롭다 말하지만 2020년에 와서는 익숙해진 문제를 제시한다. <감정화하는 사회>는 서브컬처에서의 2차 창작 중심으로 말하니 나는 포괄적으로 접근하면, 일상을 플랫폼에 이미지 혹은 텍스트로 언급했을 뿐이지만 따지고 보니 기업 브랜딩에 무상으로 기여하는 꼴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포털 사이트 경쟁을 지나 SNS 등장으로 우리 모두는 연결되었지만, 덕분에 일상의 노동화가 진행되어 아브라함 몰르가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고립된 상황 제시를 위해 꺼낸, 심해 잠수함에서 평생 극비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플랫폼은 인간의 자기표현 욕구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제공했다. 트위터는 맨션 하나당 140자로 제한해 사용자의 자기표현 부담을 최소화했으며, 하나가 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은 장문을 읽기 어려운 페이지 레이아웃, 달리 말해 장문이 뚝 끊기는 구조를 취해 길게 쓰면 독자에게 피로감을 유발한다. 유튜브도 기본적으로 영상의 최대 길이는 존재하지만 최소는 없다. 플랫폼은 구성원들에게 ‘다른 누군가 콘텐츠를 올렸다’며 지속-반복적으로 이야기를,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요구한다. 게시물 관련 ‘좋아요’ ‘댓글’ ‘공유’ ‘게시물 저장’ ‘프로필 방문’ 등의 수치는 통계로 기록되어 사용자의 콘텐츠를 평가해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길 권장하고, 인증의 복제와 그것의 인정은 스타일 혹은 개성으로 둔갑해 일상 노동자를 길들인다. 인정에 중독된 사람들은 플랫폼 피드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개성 확보를 위해 없던 일상을 만들거나 존재하는 일상을 감춰 왜곡된 세계를 형성한다. 그들에게 맥락과 투명성은 중요치 않고,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SNS’ 감정화와 인간 소외는 그렇게 심화된다. 플랫폼 설계자들은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 기반 추천 알고리즘을 구축해 순환을 도모한다. 복고 혹은 변용을 새로움이라 착각하는 순간이 찾아왔듯, 우리는 몰개성을 개성이라 말하는 시대에 있다.

 인증의 복제를 통한 몰개성의 형성에는 ‘핫플(Hot place)’이라 불리는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프랜차이즈가 주던 통일성이 지겨워진 사람들은 ‘아는 사람만 알았으면 싶지만 살짝 자랑은 하고픈’ 공간을 찾아 골목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런 공간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합판 인테리어나 <이케아> 같은 저가 브랜드가 아닌,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르지만 느낌 있는 가구 혹은 커스텀 디자인 굿즈 및 고가 브랜드로 채워져 있으며, 정방형 프레임에 피사체가 예쁘게 담길 지점(spot)을 제공한다. SNS 사용자는 포토스폿에서 사진을 찍어 텍스트와 함께 게시-인증한다. 만연해진 이 행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시각적으로는 자극적이라 이목을 끌지만 본질(ex. 카페 - 커피맛, 서점 - 큐레이션)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이 흔해지다 보니, 너도 나도 비슷한 구도와 내용으로 일상을 복제해 이걸 향유한다 해서 ‘구별짓기’가 스크린 위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다음은 ‘경제적으로’ 자기표현이 가능해지며 사실상 소비 없는 인증이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는 임대료, 공간에서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인원 등 다양한 변수와 융합되어 공간의 수명과 생산과 소비의 순환주기를 극단적으로 단축시키는 기반이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중간예술>을 쓸 1960년대 무렵이었다면 일련의 행동을 플랫폼 내부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의 일환으로 간주해도 설득력이 있다. 사진이라는 이미지는 고급예술과 민중예술의 사이에 자리해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하위계급이 향유하기에는 비싼 존재라 중산층은 되어야 소유와 향유가 가능했으니까. 문제는 <중간예술>을 비롯해 부르디외는 역사적 보편성을 추구하려 했음에도, 앞서 언급한 공간의 소모품화와 엮어 기술 보급으로 인해 2020년인 지금 인터넷이 가능한 휴대전화로 구도와 밝기만 잡아낼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듯한 사진을 찍고 플랫폼 피드에 게시할 수 있게 되어 이미지의 계급적 접근이 무색해졌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와 ‘댓글’이라는 평가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인플루언서’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어째서 사람들이 ‘인플루언서’를 선망하게 되었는가를, 감정화된 자기 최면과 폐쇄적 세계 형성에 중독됐는지 식상하게 계급적인 모방 욕구와 상승 욕구로만 접근하면 설명 불가능하다. 계급 상승을 이뤄낸 사람들은 플랫폼 내부에서 독자적인 콘텐츠의 축적, 즉 나름의 문체를 먼저 형성했기에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었던 건데, 개성을 모방하는 사람들은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에만 골몰한다. 역순이며, 계급 이동은 발생하지 않고 그에 준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만 야기한다. 플랫폼은 계급 이동 혹은 형성에 성공한 이들을 선전물로 활용해 사람들을 모집한다. 플랫폼을 '국가' 혹은 '제국'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렇다.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상실과 감정화에 대항해 많은 지식인들은 개성 혹은 스타일 형성을 독려한다. 신자유주의 아래 기계 부품으로 전락, 다음을 생각할 여유가 사라져 복제밖에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몰린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오롯하게 일어나 '나'를 부활시키길 요청한다. 여기서 개성을 문체로 치환하면 주말에 쉬기 바쁜 노동자들에게 일상에서의 글쓰기, 이를테면 자기표현을 꾸준히 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주장하는 꼴인데, 오쓰카 에이지가 3장 '스쿨 카스트 문학론'에서 보여주는, 사회 시스템을 멀리서 부감하며 문제점을 관찰하지만 개선 의지는 없는, 사안에서 멀어질 여유가 있는 일부 작가들의 무책임함과 유사하다. 문제와 지향점 사이의 다리가 빠진 미숙함이다. 모든 작문이 구원을 보장하는 건 아니고,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문체는 사치다. 문체라는 형상화된 자아, 달리 말해 외부 세계로부터의 압박을 견뎌낼 독자적 영역을 형성, 그 속에서 정확함에 가깝게 묘사, 관철할 능력’으로 불렸던 것’은, 작문과 퇴고의 순환이라는 시행착오를 요구한다. 시간이 곧 돈인 세상에서 문체 형성에 시간을 투자할 사람은 애초에 소설가, 시인, 비평가 등 ‘공적 영역에서’ 작가가 되어 계층 상승을 도모하는 문학도거나, 돈과 시간적 여유가 충분해 사회화 과정에 포함된 여가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체를 만들 계층의 사람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공적 지위 형성에 기여해 문단과 지식인 엘리트들의 폐쇄성을 보강한다. 문단이 문학상과 등단을 내려놓지 못하게 된 뿌리가, 학계의 학위에 의존하는 태도의 기원이, 무턱대고 문체가 없는 언문일치체를 가볍다며 비난하면 안 되는 사유가, 플랫폼 <브런치>를 비롯한 출판업계에 자기표현을 중심으로 하는 언문일치체 에세이가 쏟아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세상에서 문체와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고, 그들은 당신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말하지만 함정이다. 언제나 문체 형성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공공성의 형성]

 처음으로 돌아와 고고하신 분들에게 맘껏 멸시받는 언문일치체를 다시 살펴보자. ‘말하듯 쓰는이것은 좁게는 메신저, 넓게는 이런저런 커뮤니티 플랫폼에서 불특정 다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익명성에 적합하기도 하고, 부담 없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기에 이것만 한 것이 없다. 여기서 어떤 플랫폼이 감정화되어 어느 방향으로 혐오와 불안, 가짜 정보를 생산하는지, 어디가 테라포밍 당해 플랫폼 기능을 상실, 똥통으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역사를 늘어놓진 않겠다. 조금만 검색하고 생각하면   있는 부분이고 글의 핵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볼 곳은 <루리웹 북유게(정치유머게시판)>이다. 이곳이 대단하다거나 잘났다는 접근이 아니라 커뮤니티 플랫폼 순위권 상위에서 감정화에 대한 저항이 그나마 작동하는 곳이 여기뿐이라 다루는 거다. 정치를 다루는 유머 맘껏 나누라 만들어진 이곳은 거칠지만 신기하게도 퍼블릭(공공성) 형성  확산이 진행 중이다. 자신들이 정의라 생각하지 않기에 사람을 잘못 보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과감하게 손목을 자르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이들은 모니터 앞에서 팩트체크를 통해 정치인의 왜곡된 발언  언론의 가짜 뉴스에 대항하거나, 입법과정  사건의 진행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하는 것을 넘어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현실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2019  서초동 집회를 <북유게사람들> 이어가는 과정에서 기존 집회 단체들의 회계 불투명성을 드러내 향후 발생할 집회에 필요한 새로운 도덕적 기준을 제시했고, 동시에 단체가 아니라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집회를 이끌어나갈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플랫폼을 제국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도구’로 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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