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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Mar 31. 2019

계란빵

집빵이 그리운 날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집밥이 그리울 때가 있다.

퇴근 후 가족끼리 둘러앉아 갓 지은 밥과 찌개를 먹으며 하루를 이야기하는 풍경은 생각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루가 힘들고 지친 날에 집밥이 더욱 간절해지는 건 아마도 곁에 없는 가족의 온기가 그리워서가 아닐까. 서울에서 지내게 되면서 나 역시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엄마표 미역국과 배추겉절이, 집에서 만든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특히 여름이면 특제 육수로 만든 시원한 오이냉국이 많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리운 건 다름아닌 빵이다. 그러니까 집밥이 아닌 집빵인 셈이다.




엄마의 계란빵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오븐이나 전자레인지와 같은 가전기기가 집에 없었던 시절, 엄마는 빵을 굽는 프라이팬을 구입했다며 계란빵을 만들어 주겠다 하셨다. 기존 프라이팬과 다르게 몸체와 뚜껑이 연결되어 있고, 두께가 있어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정도로 꽤 무거웠다. 빵은 가게에서 파는 것이지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떤 모습으로 빵이 나올지 잔뜩 기대하며 지켜봤었다.

엄마의 빵은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만드는 방법도 의외로 간단했다. 계란을 거품기로 풀고 거기에 밀가루, 우유, 소금, 베이킹파우더를 넣은 후 프라이팬에 넣고 굽기만 하면 된다. 흔히 아는 계란빵처럼 계란을 통째로 넣는 게 아니라 계란을 휘휘 저어 밀가루와 같이 섞어 만든다. 그렇게 프라이팬에 들어간 납작한 반죽은 몇 분이 흐르면 신기하게도 부풀어 올라 '계란빵'이라는 이름을 달고 접시에 놓였다. 프라이팬에서 꺼낸 빵을 먹기 좋게 칼로 조각내어 썰면 네모난 모양과 부채꼴 모양이 나오는데 나는 부채꼴 모양으로 잘린 빵을 좋아했다. 가장자리의 딱딱한 부분을 먼저 손으로 떼어 고소함을 맛보고,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은 한입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특별한 재료 없이 계란과 우유만으로 맛을 낸 그 빵이 그때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사이 언니의 호기심으로 계란빵을 만든 적이 있다. 엄마가 빵을 만들 때 기억해둬서 만들 수 있다던 언니는 반죽에 아이스크림을 넣는 이상한 제조법을 추가했다. 우려와 달리 완성된 언니의 빵은 엄마가 만든 빵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맛이 어떠냐는 언니 말에 나는 맛있다는 말 대신 신기한 맛이 난다 말했던 것 같다. 우리는 난생 처음 빵 만들기에 도전하며 꽤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밀가루와 기름으로 난장판이 된 부엌을 보고 노발대발 화를 내셨다. 급기야 회초리를 꺼내 언니와 나를 다그치셨다. "엄마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들게는 하지 말아야지."라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소매 끝으로 눈물을 몇 번 훔치기도 하셨다. 정말 억울했다. 빵 만들기를 제안한 사람도 만든 사람도 언니였다. 난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가끔 언니가 시키는 심부름 정도만 했을 뿐인데 회초리를 맞는 건 왠지 억울하다 생각했다. 나는 회초리를 맞는 아픔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억울함에 밤새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를 갔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집에 가는 게 싫어 운동장에서 한참을 더 놀다 집으로 향했다. 그래야 소심한 복수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엌에 들어섰을 때였다. 익숙한 기름 냄새가 났고 스테인레스 그릇으로 덮인 접시가 보였다. 나는 단번에 그것이 계란빵임을 알았다. 엄마는 일하러 가기 전 자식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수 있게 빵을 만들고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나가신 것이다. 나는 그릇을 열어 부채꼴 모양의 빵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진 부드러운 계란향과 함께 냉랭했던 내 마음도 풀리는 것 같았다.




소매 끝으로 지운 고단함

그저 맛있는 빵으로만 기억되던 계란빵이 집밥 이상의 큰 의미로 다가온 건, 그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서였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고단한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불행 폭탄이 마치 도미노처럼 터져버리는 악몽 같은 날이. 결국 정리하지 못한 걱정은 집까지 따라와 온 밤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면 그것들을 흘려보내려 가만히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자면 어김없이 그날의 엄마와 계란빵이 생각난다. 회초리를 들며 소매 끝으로 고단함을 눈물로 훔쳤던 엄마와, 스테인레스 그릇으로 덮어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엄마의 계란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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