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브라더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빅 브라더도 죽을까요?"
"물론 죽지 않지. 어떻게 죽겠나?"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대화 중-
가끔 집안을 제외한 내 모든 생활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CCTV, 블랙박스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범죄예방을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84 속 가공의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 '텔레스크린(금속판으로 묘사됨)’은 그 용도가 다르다. 텔레스크린은 당(黨)이 개개인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장비로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눈동자가 따라 움직이는 포스터였다. 그 금속판 뒤에 '빅 브라더'가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 모두 가능하다. 텔레스크린은 소리를 줄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끌 수는 없다. 숨죽여 말하는 소리도 도청을 당하며, 행동, 동작 하나하나 감시당한다. 또한 당에 반(反)하는 어떠한 견해도 사상경찰에 의해 숙청되었다. 빅 브라더는 독재와 탄압을 위해 영구적인 전쟁을 이어나간다. 전쟁은 국민을 통제하고 세뇌할 분명하고 확실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빅 브라더를 증오한 마지막 한 사람이다. 윈스턴은 '진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텔레스크린이 감시하지 못하는 집안 구석에서 대책 없는 용기를 가지고 말이다. 그는 일기장에 해선 안 될 기록을 하고 말았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21세기로 넘어가 언론통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인터넷, SNS, 모바일이 발달하여 우리는 간혹 뉴스보다 더 빠르게 사회이슈를 접하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지구 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감시당하지 않고 있지만, 어디서나 감시당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텔레스크린, 즉 빅 브라더는 존재할까? 내 물음의 답은 ‘존재한다.’이다.
현재도 많은 국가가 언론통제 및 발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박근혜 전 정부 시절 세계 언론자유지수 70위를 기록하며 역대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국가와 언론을 믿는다. 나조차도 그렇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 정보도 ‘국가가 그렇다니 맞겠지.. 별일 있겠어?’라는 안일한 생각. 국가의 외침은 곧 ‘국가를 위한 일’이며 '나'를 위한 일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 믿음에 대한 대가는 잔인하게도 다시 국민들에게 돌아온다.
빅 브라더를 타도한 윈스턴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반역자로 고문당하며 마지막 저항의지도 사라져 버렸다. (물론 일기를 쓴 것만으로 체포된 것은 아니다. 윈스턴이 7년간 자유롭게 누린 사랑, 기록 이 모든 것은 오브라이언(계급이 높은 당의 내부 당원)의 계획이었다. 이후 윈스턴은 당에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다.) 자유롭게 진실을 발설하고,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 죄가 되는 국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는 국가. 국가에 저항하면 저항하는 국민을 숙청하는 국가. 조지오웰이 그린 전체주의 국가 1984 다.
그렇다면 우리는 윈스턴처럼 고문받지 않기 위해 국가에 저항하지 말아야 할까? 아니.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윈스턴이 혼자 나서서 빅 브라더를 맞서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빅 브라더는 당이며 국가이다. 억압과 탄압이 심한 전체주의 국가에서 혼자 이겨보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지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게임과 같다. 오브라이언은 '국가는 유한하나 국가는 불멸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국민 없이 불멸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국가 위에 국민이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가 아닌 국민으로, 모두가 맞서야 한다.
2017년,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온 국민이 촛불로서 맞서 평화로 이겨냈다. 그것이 소설 1984와 21세기의 다른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굴복해 빅 브라더를 사랑했던 윈스턴이 아닌, 여전히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결말을 말이다.
소설에서 빅 브라더는 끝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우리는 누구나 빅 브라더를 만나며, 누구나 빅 브라더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굳이 직접 등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체주의 사상은 꼭 역사나 소설 속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생활 곳곳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네 생각은 틀렸어. 내 생각이 맞아. 그러니 내 뜻대로 해.’
‘사회가 바라는 대로 평범하게 살아. 왜 이렇게 유별나게 굴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의견을 억압한다. 우리는 '고집 세다', '유별나다'는 말들로 차별하며 억압해왔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의견을 하나 둘 묵살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 또한 작은 전체주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윈스턴은 끝내 저항의지를 잃는다. 우리는 개인에게서 저항의지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의견을 내는 것이 당연해지고, 다양한 개인이 존중되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다양성 앞에 자유롭고 공평하지 못하다면 빅 브라더는 언제나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텔레스크린은 소리를 줄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끌 수는 없다. 빅 브라더는 언제나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그래서 빅 브라더는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