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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Feb 04. 2021

입사 후 김밥만 먹은 사연


입사가 확정되고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 날이 왔다. 충격적이었다. 6개월 인턴, 1년 계약직 그 후에야 정규직 전환이라고 한다. 항공사 객실 승무원의 인턴 기간이 길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일반 행정직까지 고용 형태가 일반 기업과 다를 줄은 몰랐다.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인턴 기간 임금도 최저시급에 준했다. 월급은 세후 120만 원 남짓이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취업시장이 얼어붙는다고 매일 기사가 쏟아졌고, 내가 원했던 항공사였기 때문에 임금이 얼마가 되든 일단은 다녀보고 싶었다. 다니면서 정 아니면 인턴 했다 치고 재 취준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규모의 항공사라서 근무하는 행정직의 수도 적었다. 본부 내의 여자들은 다 함께 밥을 먹었다. 스케줄 근무자, 약속 있는 사람을 제하면 5-6명 정도였다. 간혹 식당을 갈라서 가긴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다 함께 한 식당으로 갔다. 으레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그러하듯, 첫 주는 선배들이 밥을 사줬다. 2주 차부터는 내가 직접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했다. 


강서구 점심 물가는 다행히 그리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점심을 사 먹는 건 부담스러웠다. 시급이 밥값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 시급과 비슷한 금액의 밥을 먹는 건 사치였다. 대학교 때 했던 학원 아르바이트에 비하면 오히려 시급이 더 적었기에, 이 월급에 점심값이 얼마가 적당한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동기 언니가 제안을 했다. 월급도 적은데 그냥 김밥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고마운 제안이었다. 월급이 너무 적어서 김밥을 먹겠다고 사수에게 말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본인들은 인턴 때 도시락을 싸다니기도 했다면서. 항공사가 박봉이라더니 진짜 박봉이구나, 했다. 


취업 준비할 때, 항공사는 집에 여유 있고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박봉이지만 다른 사기업에 비해 근속 보장도 잘 되는 편이고 항공권을 저렴하게, 자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처럼 큰 항공사는 내가 다녔던 회사보다 임금이 더 높아서 김밥 먹을 정도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월급이 적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받아보니 더 적었다. 소비가 학생 때보다 늘었기 때문이다. 회사 드레스 코드는 비즈니스 캐주얼이었지만 내가 가진 옷은 모두 대학생 스타일이었다. 옷도 사야 하고 친구들에게 취업했다고 취업 턱도 내야 했다. 120 남짓 되는 월급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다 하고 나면 적자였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만 가질 수 있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동기 언니들과 화장실에서 숨어했던 대화, 퇴근길에 먹었던 치킨, 그리고 스스로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었다는 뿌듯함까지. 신기하게만 봤던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들의 모습에 익숙해지고, 항공 업계에서만 쓰는 용어에도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의 나는 조금씩 항공사 직원의 정체성을 갖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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