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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Oct 16. 2020

낱말을 엮듯 사람을 엮다

<배를 엮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항해

세상은 넓고 책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 나누는 사람마다 읽었던 책들이 다르고, 제법 도서관이나 서점을 들락거렸던 것 같은데 작가 이름이나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한 명작들이 넘쳐납니다. 신 앞에서(Coram Deo) 한없이 겸허해지는 것처럼 책 곁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독서 노트 몇 권을 적고 ‘책 좀 읽는다’고 우쭐거렸던 철부지 초등학생 때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움이 더해집니다.

    

사내·외 몇 곳에서 독서 나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 1년 동안의 월별 도서를 미리 정해놓고 매월 미팅을 갖는 한 모임에선 사회과학, 역사·신화, 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다루는데요. 12권 가운데 10권 정도는 지나쳤던 것인 데다, 절반 이상은 완전 생소한 책들이어서 새롭게 읽고 나눌 때마다 즐거움이 훨씬 더해집니다. 이달 만난 도서는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저)란 일본 소설이었습니다.  

일본 소설 <배를 엮다>. 디자인된 표지를 벗기니 깔끔한 일본어 제목이 나타납니다. 저는 오른쪽이 더 마음에 드네요!
2012년 서점대상 1위를 수상한 <배를 엮다>는 어느 출판사 사전편집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말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마지메와 사전 하나밖에 모르는 편집부 사람들. 작가는 사전 한 권을 위해 15년을 바친 사람들을 통해 무엇인가 몰두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일하는 모습의 아름다움과 뜨거운 감동을 전한다. 출간 후 일본에서는 판매부수 60만부를 돌파하여 2012년 소설 판매 1위를 기록한 미우라 시온의 새로운 대표작.     


책 표지 안쪽에 적힌 글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보다 책 소개 및 줄거리 요약을 더 잘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 듭니다. 위의 글대로 사전 만드는 부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책 속에서 다룬 15년간 쭉 사전편집부 정규직원으로 근무한 이는 마지메 하나뿐입니다. 정년으로 은퇴한 아라키 고문의 후임이지요. 촉탁직으로 감수를 맡은 마쓰모토 선생, 계약사원 사사키, 마지메가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케팅부서로 이동한 니시오카, ‘대도해(大渡海)’ 발행 3년을 앞두고 합류한 기시베, 사전 교정 작업에 동원되는 50여 명의 아르바이트생은 임시로 사전편집부에 몸담은 조력자 또는 손님 같은 존재입니다. 출판을 위해 방대한 작업이 필요한 부서의 정규직 인력이 한 명뿐이라니…. 어지간히도 장사가 되지 않는 사업인가 봅니다.      


독서 모임 구성원 중에서도 독립출판사 대표분이 몇 계신데요, 이분들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온전한 책 한 권을 만드는 작업이 정말 쉬운 게 아닐 테죠? 애잔함과 존경스러움의 감정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사전편집부가 만드는 ‘대도해’란 사전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마쓰모토 선생과 아라키 고문에 따르면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죠?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는다는 생각을 담아 지었다”는 표현이 낭만적이고 의미 깊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기에 대도해를 출판하는 데 장장 15년이 세월이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전편집부에서 새로 만드는 사전 <대도해>의 의미가 참 인상적입니다. (본문 36페이지 中)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가 좌초되지 않았던 것은 말을 엮듯 사람을 엮는 작업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등장인물 모두가 시종일관 사전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쓰모토와 아라키, 마지메와 같이 사전 제작이 곧 업(業)이고 삶인 이가 있는가 하면, 니시오카나 가시베처럼 딱히 흥미는 없었지만 사전편집부에서 함께하며 열정이 생기게 된 인물도 있습니다. 단어에 담긴 여러 뜻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또 다른 단어를 이어가는 사전처럼, 그들은 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미를 발견하며 연결됐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대도해 제작의 꿈을 엮어갔습니다.      


물론 저절로, 그저 운 좋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지요. 용기로 내딛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메처럼 말입니다. 말을 다루는 사전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사람에겐 말을 잘하지 못했던 그는, 서툴지만 마음을 담아 니시오카에게 말을 건넸고 가구야에게 러브레터를 보냈습니다. 그게 상대에게 ‘나는 사전편집부에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하고, 유능하고 멋진 요리인 아내를 얻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김춘수의 시처럼 (의미 없는 몸짓이 아닌) 꽃과 같은 관계가 맺어지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사진편집부원이 줄고, 재원 충당을 위해 다른 작업이 끼어들며, 몸의 기력을 잃어가는 등 거친 풍랑과 파도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마지메 등은 대도해 출판의 꿈을 끝까지 이어갔습니다. 무척 지난한 과정이었겠지만,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아마도 참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이게 사전이 지닌 마력이 아닐까 생각 듭니다.     


우리 독서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아나운서와 작가도 있지만, 약사나 요가 강사 등의 직업을 가진 분도 계십니다. 각자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지만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엮음의 강도를 더해, 서로에게 힘이 주며 혼자 이상의 힘을 내는 모임으로 변화해가지 않나 싶습니다. 회사생활 역시 같겠지요. 이처럼 같은 뜻으로 엮인 이들이 목적지를 향해 함께 가는 여정은 행복한 법입니다.  

    

마쓰메를 보면 사람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영업부서에서 조금 더 있었다면 ‘굼뜨고 어눌하다’는 평가 속에 퇴사하고 말았을 그를, 아라키 씨는 알아봤습니다. 직소 퍼즐처럼 책장 비품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사전 편집에 ‘적확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만약 아라키가 마쓰메의 수많은 단점을 고려했다면 사전편집부 마쓰메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대항해 발행도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객관적 입장’이라면서 다소 냉소적인 평가를 내릴 때가 많습니다. 상대의 장점을 키워주지 못하고, 단점을 지적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요? 마쓰메의 장점을 눈치채고 사전편집부로 이끌었던 아라키처럼, 제 앞에 선 인물이 지닌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전에 먼저 제 앞가림부터 해야 할 텐데... 참 쉽지 않습니다!^^

영업부서에서 시원찮던 마쓰메, 사전에 한평생을 바쳐온 마쓰모토 선생에게 이 같은 기쁨을 준 놀라운 사전 편집자가 됐습니다. (본문 327페이지 中)

잠시 저 자신이 선 곳을 돌아봅니다. 저는 마쓰메 유형일까요, 아니면 니시오카 같은 인물일까요? 점점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함께하는 가족, 친구, 회사 구성원 등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일해야겠습니다.

     

<배를 엮다>를 읽는 동안 참 즐거웠고요. 내용도 길지 않고 번역도 깔끔해서 누구든 이 책이 준비한 독서의 바다에 빠져들겠다 싶습니다. 시간과 마음이 나신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소설이 부담스럽다면, 동명의 만화나 <행복한 사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영화를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말모이>와는 다른, 잔잔하면서도 가슴에 울림을 주는 사전의 맛을 음미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행복한 사전>. 원작을 잘 살렸는데... 이야기가 너무 잔잔하게 흐른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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