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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un 16. 2023

오늘도 멋진 내가 되는 주문

오피스워크 말고 어디까지 해봤니 #2


2020년 10월에 제 여동생이 꾸려가고 있는 1인 브랜드 스튜디오묘미의 웹페이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이후 텀블러(Tumblr)에도 옮겨왔었는데 '오피스워크 말고 어디까지 해봤니' 시리즈의 통일성을 위해 문체만 다듬어서 가져왔습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콥스하버’라는 도시에 와서 농장에서 일을 하며 노매드 라이프로 지낸 지 삼 주째, 각자의 이유를 갖고 이곳에 모인 다양한 경험과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이곳에 와있기에 각자 경험하고 있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다르지만 슬픔보다는 기쁨에 집중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소위 화이트컬러류의 일만 해온 내가 과연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적응할 수 있을까

몸으로 하는 일의 묘미, 특히 이 완전한 일차 산업의 일을 하며 지금까지는 크게 몸이 힘들거나 다치는 일 없이 남들 하는 거 따라가고 있는 수준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에 블루베리를 서른 바구니쯤 딸 때, 나는 열다섯- 스무 바구니쯤 따는 수준. 몸으로 하는 일의 묘미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개선하면 좋을까’가 아주 명확해서 그것을 하나씩 개선해 보면 퍼포먼스가 개선되는 것 또한 피부로 직접 체감할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예를 들어 바구니에 블루베리를 넣는 방식을 바꾸거나, 꽉 찬 블루베리 바구니를 제출하러 가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 등으로 그날의 퍼포먼스를 늘릴 수가 있었다. 덜 익거나 익지 않은 블루베리 (레드, 그린이라고 불림)를 골라내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도록 최대한 질 좋은 블루베리만을 따서 바구니에 넣어야 하는데, 이 작업을 잘 해낼수록 결과적으로 상품가치가 있는 블루베리를 많이 제출할 수 있기 때문에 퍼포먼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몸이 얼마나 정확하고 솔직한지, 탄수화물이나 MSG가 가득한 음식 (예를 들면 라면 같은)을 먹고 난 뒤의 하루와 단백질/ 채소 위주의 건강식 식단을 먹은 후의 퍼포먼스 또한 크게 체감이 되더라고. 아마 서른 즈음의 나이가 되어서 더 그런 걸 수도. 그러나 건강식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 라면이나 정크푸드, 탄산 같은 것들도 적당히 절제는 하되 가끔 너무 먹고 싶을 땐 먹어야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사람에 대해 공부하고 알면 알수록 사람은 그렇게 금욕적으로 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므로 그렇게 억압하지 말고 좋아하는 걸 즐기게 해 주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아무튼, 호주의 시골에 와서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더 연장하기 위한 명목으로 88일간의 농장 라이프를 선택한 것, 지금까지는 너무나 만족하는 결정이다. 언제든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는다는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안정욕구’를 건드리는데, 그래서인지 늘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확신이 들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하고도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결정을 여러 번 번복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강하게 올라오는 ‘안정욕구’를 누르고 내려진 결단은 언제든 번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정들은 첫째 이성보다 직감이 이끄는 것일 경우가 많았고, 둘째로는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될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일 경우가 많다. 그동안 안 해봤기 때문에 두려운 것, 그래서 피하고 싶은 감정이 드는 것을 거듭 고민한 끝에 시도하면 우리는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 같.


매일같이 일 끝나고 놀러오던 호주 시골, 콥스하버의 바다

양보다는 질적인 성장을 하는 것, 그게 요즘 내 모토다. 멋진 사람이 된다는 건 사실 양적인 성장과는 좀 다른 개념 같은데, 8개월 전에 호주로 떠나올 때만 해도 나는 양적인 성장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을 해서 이곳의 경험을 쌓으면 이 쪽으로 커리어를 만들 수 있고, 이곳에서 추천서를 받으면 이 분야의 길이 열리고 등등등.... 당시에는 질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사실은 양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춘 거였었다..

그때보다 지금 고작 몇 개월 더 살았지만, 크게 삶의 대세를 거스르는 선택을 하면서 얻은 것은 그야말로 질적인 성장이다. 어른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거스르거나,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직감을 따르거나 하는 것들. 그리고 그런 걸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그 책임은 내가 진다는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힘이 있고, 그 힘은 결과적으로 멋짐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어떤 결과가 닥치더라도 자유의지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였다는 자부심 같은 것. 이 여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 생의 감각이 아닐까 했다.



나에게 멋짐의 조건, 일단 유연함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먼저 생각나는 건 ‘실패할 수도 있지만, 뭐 어때, 나한텐 다시 복구할 수 있는 힘이 있어’ 같은  마인드. 심리학에서 말하는 회복유연성(Resilience)개념이며 또 자존감이 높아서 ‘지금 이 모습을 어느 틀 안에 가둬두거나 꼭 이름 지어서 박제하지 않아도 괜찮아’ 같은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대상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가둬두고 정의하지 않는 것.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래서 '나도 사람들도 그리고 사람들과 나의 관계도 언제든지 변할 수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사고가 확장되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곳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그저 바다를 즐기고 햇볕을 쬐며, 맨발로 잔디를 걷고 내일 새벽에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것. 그리고 저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면서 질적으로 더 멋진 사람이 되어나가는 고민들만 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난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것, 양적인 성장에만 목말라있던 나에게는 너무 높은 수준의 삶 같이 느껴졌었다.


그 와중에 가끔씩은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현타가 찾아올 때도 있으니 무작정 에너지가 고조되기만 하지는 않는 나날들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연락다. 그들과 보내온 서른 이전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이뤘음을 알고, 생각해 보면 힘든 때도 있었지만 그걸 겪어온 나와 그들이 자랑스럽기도 했고,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아끼고 진심으로 마음을 내줬던 사람들은 어디서든 그 마음에 응해주리라는 걸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들이 지금 이곳에서 힘들 때도 있지만 (2023년의 옮긴이의 말- 어디든 노동자는 착취당하기 마련인 듯, 노동자의 권리 따위 안중에도 없는 고용주를 만나 분개했고 그것에 분개하지 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더 큰 절망을 느끼고 지식과 용기의 중요성, 그리고 그걸 실현해 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진심으로 감사하기도 했었다. 많은 이야기보따리가 생략되어 있음) 그것 또한 잘 겪어낼 힘 주기도 하고.


그러니 언제든 나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의 바운더리가 되어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다정한 마음으로 살아가보자고. 마치 당연한 듯, ‘오늘도 멋진 나, 나를 포함한 일상의 존재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된다’는 주문을 걸어봅시다.


나는 다정하다, 다정하다, 다정하다.

정말로.




원글 출처- https://www.tumblr.com/fearless-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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