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의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 또한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익숙한 것들에 싫증이 났고 하루하루를 관성에 젖어서 사는 나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잠시 어디서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호주에 왔었다.
"호주는 여자가 살기 좋아서, 여자들은 한번 호주에 가면 다들 어떻게 해서든 안 돌아오려고 한대."
여성의 인권과 평등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주변인들이 여러 번 말했을 때도 나는 호주에 잠시 다녀올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리만큼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인사를 했었다. 한국에서 맺고 있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인연들에게 -가족과 친구, 친척은 물론 일로 만난 사이, 운동하고 요가하며 취미생활을 함께한 사이, 자주 드나들던 집 앞 카페나 편집숍 사장님에게까지도- 인사를 하고 떠나온 호주였다.
정말로 호주에 정착하고 살게 될 줄은 몰랐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와서야 생각해 본다. 언제든 전지적 작가시점에서는 지나간 일 따위,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의식적으로는 '삼 개월'만 머물면서 쉬며 영감을 얻고 다시 한국에 들어가서 치열한 마케팅/ 광고업계에 돌아가는 계획을 세웠었으나, 무의식은 내게 호주가 잘 맞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왔지만, 대세를 결정하는 큰 결정 앞에서는 직감을 믿고 따랐으며 거대한 흐름에 내 몸을 맡겼던 같다. 일부러 계획해서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어느새 나는 물 흐르듯이 이곳에 속하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이전의 나와는 매일 조금씩 이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서른 즈음까지 살아오며 축적된 것들 중 과거에 가지고 있던 낡은 습관과 오래된 사고방식, 당연하다 믿어왔던 가치관 등에 덤덤하고 쿨하게 작별을 고하는 삶. <서른 즈음에>의 가사에서처럼 '매일 이별하는 삶'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별하면서 매일 이별하는 것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으니, 꽤 자주 이별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이 점점 익숙해져 가면 갈수록, 내가 나고 자라온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
이곳에 마음 둘 곳이 많아지고 편해질수록, 내가 마음을 주던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놓치기도 한다.
코로나19를 거치기 전에 이곳에 넘어와 몇 년 만에 한국에 갔을 때, 내가 '즐겨찾기'해두고 금요일 밤, 주말마다 드나들던 을지로와 성수, 한남의 장소들은 거의 모두가 사라지거나 잠정적 휴업 중이어서 네이버 지도에는 안타까운 별표시만 남아있었다. 그 당시엔 피앙새였던 지금의 남편이 얼마나 실망했었는지... 내가 호주 살이에 지금보다 마음을 붙이진 못했을 때 입이 다르고 닳도록 자랑하던 맛집, 카페, 편집숍들이 사라지니 내가 쥐고 있던 '취향'이라는 것과 그걸 찾기 위해 투자한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나의 취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이십 대의 시간을 쏟았다고 믿어왔었는데, 그 자아상에 균열이 갈 정도의 충격이라면 전해지려나. 그래서 세 달을 머무르는 동안, 그동안 다녔던 장소들 말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고, 새로운 장소는 내가 알던 곳을 완벽히 대체해주지 못할 가능성이 컸고 그때마다 느꼈던 실망감은 사실은 '이제 내 집처럼 드나들던 서울'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었다. 지구 어디에도 내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있는 서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걸 서울을 떠나서 만난 내 인생의 동반자에게 공유해 주기란 불가능한 것이구나.
한국 갔을 때 많이 지웠는데도.. 남은 리스트 중 문 닫은 곳이 서른네 곳이다.
이 당연한 상실감과 이별을 이곳에 이민 온 지 사십 년이 다 되어가는 시부모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겪으셨겠지. 시부모님 이외에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유년기를 보내지 않은 채로, 성인이 다 되어 뿌리를 옮겨 심은 1세대 이민자들이 수도 없이 겪었을 상실감과 당황스러움. 그 감정들을 경험하며 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그들에 대한 선입견과 저항 중 한 가지를 깰 수가 있었다.
"호주에 가면 한국 사람들을 제일 조심해야 돼, 특히 교민들. 예전 사고방식 그대로 호주에 살아서 완전 보수적이고 꽉 막혀있대"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거나 몇 년간의 유학을 경험한 이들이 내게 준 공통적인 인풋이었다. 처음에는 갸우뚱했지만 이곳에서 여러 일들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고, 짧게 몇 번 데었다. 그리고 그걸로 내 기준에서 그들과 나를 타인으로 규정지었다.
한국에서 갓 온 내게 한인타운인 '이스트우드'나 '스트라스필드'에서 본 교민들은 촌스러워 보였고, 카페에서 일하는 내게 반말로 주문을 하는 교민들은 예의 없고 구시대적 이어 보였으며, 비즈니스 미팅자리에서 '라떼는 말이야~'만 몇 시간 동안 연발하는 교민들은 꼰대 같았고, 사람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들의 비자상태로 분류하는 교민들은 천박해 보였다.
솔직히 내 기준에도 그들은 그간 들었던 말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한국 유행과는 전혀 다른, 유행에 뒤처진 옷과 머리들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이 내게 선 넘는 말을 하고 한국에서 갓 온 사람으로 나를 규정해 버릴 때마다 답답하고 메울 수 없는 갭이 느껴지곤 했다. 코로나19라는 환경적 요건을 빌미로 내 능력을 싼값에 이용해 보려던 사람들은 또 어떻고,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도 봤다. 잠깐 다닌 한국회사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이름도 성별도 어닌 '워홀'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스스로에게 미리 물었어야만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더 다양한 종류의 교민들과 호주 사회에 속한 다양한 인종들과 부지런히 만나게 되면서는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잡채였음을 알게 되었다. 교민사회에 갇혀있지 않고 다양한 인종들이 이민 와서 이룬 호주라는 사회를 경험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교민들의 어떠한 특성이 나를 상처 입히지 않았다. 그들 또한 이 거대한 이주 정책의 일부로, 수많은 이민자들이 갖는 성향을 공유할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너무 과민반응하고 그들이 내게 상처줄 수 있는 위치를 내어주고 있었던 것 아닌가? 이걸 깨달은 시점에서 이전의 내가 가지던 선입견과는 이별하게 되었고 교민들 중 그 누구도 내게 상처를 줄 순 없게 되었다. ㅋㅋ
어느 한 집단의 성격을 어느 한 가지로 통일해서 정의하려는 닫힌 사고방식, 그것은 게으름 그리고 부끄러움 같은 감정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보다 그들을 '타인'으로 분류하고 '악'으로 규정해 버리면 편하며, 정작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나 또한 이곳이 처음이라 서툴거나 또 방어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냥 제일 속 편한 것은 오기 전에 들은 말들에 힘을 실어주며 선입견을 굳히고 마음을 걸어 잠 구는 것. 그렇다면 앞으로 수없이 마주하게 될 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집단이든 처음에는 크고 작은 '텃세'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내가 한국에 살았어도, 충분히 만날 법한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다니던 직장, 업계, 도시를 떠나서 나의 경험과 인맥, 학위 같은 것들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언제든 만날 법한 사람들. 그리고 이 호주에서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가장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이 교민이었을 뿐, 바로 이 호주의 다민족 사회에 뛰어들었다면 아마도 한국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라떼는 말이야~'를 들었을 것이다. 언어가 같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만날 법한 사람들을 오자마자 만났고 어느 집단이라도 적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텃세'를 겪은 것일 뿐이지 결코 그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절대적인 특성을 갖고 '꼰대처럼'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 또한 수많은 변수와 개인의 자유의지가 부른 선택들이 점철된 독립된 개체들일뿐이었다. 처음에 '자라 보고 놀란' 마음으로 가졌던 선입견이 조금씩 희미해질수록 정 많고, 순수하고, 진실된 '호주 사람'의 좋은 점을 가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고 나니 내 곁에는 호주에서 태어난 남편과 우리 아가, 그리고 나처럼 성인이 되어 삼십 대에 호주에 이민온 시부모님들이 생겨났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다른 백그라운드(Ethnicity)를 가진 친구들과 또 나처럼 이민온 친구들이 내 삶에 들어왔다. 계속 마음에 문을 닫아놨다면?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을 거고 그들이 열어준 새로운 세상 또한 만나지 못했겠지.
그렇지만, 아직도 현지에서 갓 온 내게 교민들과 부대끼면서 느껴지는 온도차이는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처음 만난 이에게 '존댓말'을 하고 '님'을 붙이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왔던 내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격의 없이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른다. 또 주거공간에 대해 '월세가 얼마인지' 아니면 '대출을 얼마나 끼고 있는지'를 묻는 것을 매우 실례라고 여기며 살면서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데 비해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거공간의 매매가격과 주 당 렌트비, 그리고 동네 별로 집 값의 변동, 주거 공간의 형태와 가격 (유닛, 아파트, 타운하우스, 하우스...)에 민감하며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이를 상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놀랐었다. 한국인만 그런것 아니고 외국인들도 그런다.
그러나 한번 안전지대를 벗어나서 뿌리를 옮겨서 심어본 사람은 안다. 체면치례를 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내 생존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당장 이곳에서 서바이벌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일단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것이 내일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성공할 확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생존의 문제, 나아가서는 이곳에 더욱더 사람답게 존재하고자 하는 본원의 욕구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예의와 염치 때문에 묻지 못하는 것들을 턱턱 묻기도 이고, 한국사람에게는 친근함의 표시로 반말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기분 상할일이 줄었다. 영어 및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반말'을 친근함을 섞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난 뒤부터는 반말이 그렇게 무례하게 들리진 않는다. 정겨움의 표현인 반말과 무례함의 상징인 반말은 그 온도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무례한 사람들은 바로 거르고 나의 바운더리를 지킬 삶의 스킬, 다들 하나쯤은 갖고 있잖아요?
또한, 여기서 살다 보니 알게 된 교민들의 입장도 있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갓 온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계산적이고, 성격이 급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나는 그 말들이 모두 다 수긍이 간다. 호주가 개방적일 것 같아도 고립된 섬나라여서, 성 다양성이나 일터 문화나 사회보장제도 쪽에선 진보적이지만 또 상당히 보수적이고 뒤떨어진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의 빠르고 재치 있는 것들을 못 따라간다. 그리고 워낙 경쟁사회에서 치이며 열심히 사는 것이 기본값인 우리들은 많은 자원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호주의 사회적 분위기에 물들어있는 사람들 눈에는 계산적이고 급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반가움보다는 경계의 눈초리부터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그 사람은 여기에 워낙 온갖 국적의 사기꾼이 많고 당한 게 많아 힘든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방어기제의 발현...이랄까. 나이가 들수록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생각이 굳어지고, 새로운 경험이나 생각의 전환이 없이 그저 방어적으로 살고 있는 상태의 사람이 많은데 그건 생각해보면 정말 짠한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급해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무척 많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날 때마다, 오히려 매일 이전의 나와 이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능력이 허락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누구든 생각을 바꾸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이곳에서 지내는 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면 나는 이제 한국인이라기보다는 호주 교민, 혹은 글로벌시티즌에 가깝게 되겠지. 각양각색의 정체성을 가지는 글로벌시티즌이라는 정체성이 생겨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을 기록해 두면 좋을 것 같아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