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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물의 여왕 Jun 24. 2020

서평 -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마리 루티, 동녘 사이언스

2020년 6월 17일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의 원제는 ‘The Age of Scientific Sexism’, ‘과학적 성차별의 시대’다. 현실세계에서 부딪히는 성차별의 실제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마당에, 굳이 ‘과학으로 증명한 성차별’까지 생각이 미친 적은 없었다. 하여간 제목을 보고 현란한 과학적 이론과 증명의 과정을 따라가려면 버겁지 않을까 싶었는데, 음, 완전히 기우였다. 도대체 이들의 주장 어디가 과학인 건지, 입증할 자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데이터 따위는 책 전반에 걸쳐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과학적 증명의 부재와 왜곡 또한 저자 마리 루터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였으니까. 사회적 선입견 혹은 시대적 윤리관에 봉사하기 위한 가정과 추측에 기반한 유사과학?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소위 ‘진화심리학’의 성차별적 가정과 증명들은 한마디로 구.렸.다. 


‘똑똑한 (혹은 자립적인) 여자가 남자 기를 죽인다. (그러므로 남자가 다른 데서 위안을 찾는, 즉 바람을 피우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여자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애를 거쳐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결혼 후 배우자와 다양한 갈등과 우여곡절의 시기마다 등장하는 조언, 인생의 진리랍시고 강요되는 ‘남자는’, 혹은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모든 문장의 끝은 기승전 여자탓, 여자 책임이며 남자는 원래 그런 것이니 여자 니가 참고 잘해라’가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책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남자와 여성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과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오히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남녀관계에 대한 어르신들의 지혜와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이 어떻게 이렇게 하품 나도록 똑같은지.  그런데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은 어르신의 잔소리와 달리 과학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다. 문제는 그 껍데기 덕분에 이 고리타분하고 밑도 끝도 없는 ‘여자 탓 타령’이 보편타당한 자연과학의 진리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절대성과 불변성이 부여되고, 결국 가부장제도에 입각한 사회구조를 공고화하고 그 불평등함과 폐혜에 대한 반론과 의문을 가로막는 절대반지가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남녀의 성차이를 강조하고 절대화하는 실제와 의도에 대해 다시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전반부에 이어, 진화심리학자들이 누누이 말하듯 유전적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게 된 진짜 이유를 들여다 보는 3장부터 이야기는 한층 흥미로워졌다. 특히, 농경사회의 등장과 함께 여성이 재산의 형성과 세습의 도구가 되는 과정은 조금 더 파고들었으면 싶었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인류의 선택에서 알 수 있듯, 성평등이야말로 진화적 적응의 결과일 수 있다는 밀러의 주장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된다. 


결혼제도의 문제점과 정치역학을 통렬하게 분석한 제 5장. 잔혹한 낙관주의에 이르러서는, 결혼했거나 아직 결혼하지 못한 이로 구분되는 결혼만능의 사회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들여다 보게 한다. 특히 결혼생활에서 겪는 좌절과 분노가 나 혹은 배우자 개인의 탓만은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의무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나(여성이든 남성이든)에 대한 자기비하를 멈출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도 피해가기 힘든 분노의 용광로로서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너무도 내밀하여 나자신과 도저히 분리할 수 없다고 여겼던 문제에 대한 객관적 거리 두기를 경험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결혼제도의 가부장적 음모를 직시하여 영속적인 일부일처제의 굴레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성 간의 영속적인 사랑의 가능성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이성 혹은 동성, 평생의 반려이기를 바라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전제로서, 저자는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 불가해함을 받아들이려는 용기와 인정’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는 항상 내 이해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 - 그리고 확실히 내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 정서적 투자의 안전을 보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진정한 방법으로, 진정한 발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숙한 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있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 (p.291)


‘인생의 본질은 막막함’이라는 구절을 어느 정신의학자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오랜 속담이, 진화심리학자의 ‘과학적 성별학’을 뛰어넘는 진리인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이분화된 칸막이로 구분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무엇보다 나 아닌 그 또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 막막함을 감당하고자 할 때 사랑은 진정한 가능성으로 다가올 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투사와 같던 저자의 목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가능성과 의미를 되짚는 맺음말에서 마치내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결국 사랑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반박하고 마침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있는 그대로 서로를 수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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