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대하여
Book Review 27
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대하여
Sara Smarsh, 반비, 2020년판
I. 서평
가난한 아이를 영영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둔 나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가난한 아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사실 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은 못했어.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돌리도록, 스스로를 시궁창에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환경이 결과를 좌우하지. 아니면, 내 母語로 말하자면 이런 거야.
“거두는 것은 날씨 나름이잖여? 좋은 씨앗은 우짜든 간에 싹이 트겄지만 그래도 우박이 쏟아져 불면 말짱 헛짓이여.” - P.12 작가의 말에서 발췌
하트랜드는 십대 미혼모와 원치 않았던 자식들로 수세대를 이어온 저자의 가족사를 학문적 시각에서 분석한 관찰기이자 그 빈곤의 굴레를 기적적으로 탈출한 개인적 회고록이다. 책의 부제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뼈빠지게 일하고도 쫄딱 망하는 삶의 공식은 십대 미혼모와 원치 않는 자식의 탄생으로 시작해서 세대를 이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저자 새러 스마시는 미국 남부의 광활한 평야 지대이자, 농사에 종사하는 가난한 백인 빈민층을 일컫는 용어인 레드넥들의 고향인 캔자스주에서 16살 어린 엄마의 원치 않는 아이로 나고 자랐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매년 등록금 인상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2년 마다 이사 갈 집을 물색하며 전세와 반월세 사이에서 경로를 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주변 형편도 다들 고만 고만한지라 가난을 뼈저리게 체감한 적은 없다. 누군가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한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개천에서 용난 수능만점자 내지는 사법시험 합격자의 성공 인터뷰 등에서 인용된 문구였을 것이다. 따지자면 저자도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다. 그런데 그녀가 증언하는 가난의 실상은 저 ‘부끄럽지 않은 불편함’이라는 표현이 한가한 소리로 들릴 만큼 잔인하고 집요해서 절대적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목이 메이고 가슴이 조여 들었다.
이 책은 대대손손 이어진 빈곤이 어떻게 한 집안을 파괴하고 그럼에도 생존해 나가는가에 대한 르포다. 세상 풍파에 골병 들고 창조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은 채 안에서 곪아 터지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증조모에서 시작되어 줄줄이 10대 미혼모와 그 자식들로 이어진 모계를 찬찬히 되짚어보는 저자의 육성을 따라가다 보면, 192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변화 가 4대에 걸친 가족의 굴곡진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목격하게 되는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이토록 잔인한 빈곤의 민낯을 고발하는 내용이건만, 저자는 어쩌면 영영 태어나지 않을 자신의 딸에게 들려주는 편지의 형태로, 사회고발과 자기고백, 학문과 문학을 넘나드는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독특한 형식과 저자의 진솔한 문체 덕분에, 하트랜드는 여성문제와 빈곤문제라는 주제의식만으로도 도리질을 칠 수 있을 독자들까지 외면할 수 없는, 가슴 시린 독서 체험을 선사한다.
II. 기억할 글귀
작가의 말
가난한 아이를 영영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둔 나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가난한 아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사실 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은 못했어.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돌리도록, 스스로를 시궁창에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환경이 결과를 좌우하지.
아니면, 내 母語로 말하자면 이런 거야.
거두는 것은 날씨 나름이잖여? 좋은 씨앗은 우짜든 간에 싹이 트겄지만 그래도 우박이 쏟아져 불면 말짱 헛짓이여. P.12
1. 지갑 안 동전 한 푼
그래서 어릴 때 내가 맨날 하지 말라는 말만 듣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마, 숨쉬지 마, 웃지 마, 울지 마, 내 존재로 인해 드는 비용, 먹는 음식,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차지하는 공간, 나는 전부 의식했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비용이 정당화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내 존재의 가치는 우리 어머니나 그 이전의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게 아니라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지. P.58
2. 가난한 여자의 몸
우리는 가난하고, 그리고 여자로 태어났지. 이것만 해도 이 세상에서 우리 몸은 투 스트라이크를 당한 거야. 게다가 엄마는 남자들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외모를 가졌고, 나는 원하지 않은 아이였으니, 안 그래도 위험한 세상에서 흔들리던 우리가 각각 원 스트라이크씩을 더 먹었지. 하지만 엄마는 자기가 쓰레기가 아니란 걸 알았어. 자기 딸도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도. P.130
3. 밀밭 사이 끝없는 자갈길
할머니가 어떤 병진단을 받았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아빠가 “여자들이 겪는 문제”라고 말한 것은 우울증 같은 거였을 거야.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고립된 아내이자 엄마의 창조적 에너지가 억눌려 안에서 곯아 터지는 병이지. P.141
안에서 곪아 터지는 여자들.
한 예로, 그 삶을 살아본 사람들은 중요한 건 트레일러 자체가 아니라 트레일러가 주차된 땅이란 걸 알 거야. 우리 트레일러는 아빠가 고른 땅 위, 나중에 아빠가 우리 집을 지은 땅에 있었지. 사방 풀밭뿐이라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곳이지만 대신 산과 나무가 없으니 몬태나주보다도 더 큰 하늘이 있었어. 세상을 다 덮은 하늘에거 어둑한 뇌운 사이로 밝은 빛이 비치는 광경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어. 샌드위치 패널 트레일러 집에서 나와 그런 장엄한 장관을 맞닥뜨리면 우리 집에서 좋은 경치를 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구경하는 느낌이었지.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느낄 수 있었어. P.154
나는 어디에서든 마음의 평온을 찾는 법을 깨쳤지만, 그 평온감은 캔자스주 시골 땅에서 기른 거고 캔자스는 주 깃발에 포장마차와 ad astra per aspera, 곧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곳이잖아. P.187
4. 나라가 부과하는 수치
가난한 백인은 백인성에 권력을 부여하는 사회 안에서 특히 불편한 존재야. 우리 사회에서는 백인을 인종적 표준으로 삼고 나머지 인종은 ‘타자’로 간주할 뿐 아니라 백인성을 경제적 안정과 동의어로 취급하기도 해. 그러니 계급과 무관하게 백인은 유색인의 타자성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하게 되지만, 부유한 백인의 입장에서 가난한 백인을 보면 신체적으로는 자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백인 노숙자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과 비슷하다는 데서 불편함을 느끼는 거야. P.192
내가 속한 계급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잖니. 거기에서 수치심이 생겨. 중산층과 상류층의 서사가 가득한 곳에서는 가난하게 산다는 것에 깊은 수치를 느끼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느낄 수 있어. P.193
하지만 내가 느낀 수치는 내 죄에서 오는 게 아니었어. 사회 전체에서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이지. 경멸이 미국 법에 아예 명시되어 있어.
빈민에 대한 멸시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가 복지 제도에 대한 태도일 거야. 공공 정책이나 언론에서 복지 프로그램에 의존해 살아가는 걸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어도 지원을 안 했어. P.193
처음에는 가난이 그저 수치이기만 했다면, 내가 살아오는 동안 가난이 점점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바뀌어갔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 이율, 연체료, 벌금 등의 형태로 은행 금고로 흡수되었어.
그런 한편으로 20세기 후반 미국은 열심히 일한 이에게는 경제적 보상이 주어진다는 약속에 여전히 매달렸지.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은 나쁜 사람, 즉 게으르거나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어. P.195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경멸을 가난한 사람은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내면화하지.
그러니 정부에서 내주는 돈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야말로 ‘공돈’이란 개념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인거야. P.200
계급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인종 따위의 다양한 구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임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 우리 식구들은 그런 걸 ‘개소리’라고 불러.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런 개소리가 건드릴 수 없는 자리가 있단다. P.205
20세기 후반에는 카운티나 시에서 사소한 법규 위반을 적발해 돈은 거둬들이는 데 점점 혈안이 됐어. 내가 어릴 때 정부 예산이 대규모로 감축되면서 전에는 주나 연방 지원금으로 충당하던 비용을 시나 카운티에서 스스로 마련해 메워야 했거든. 이런 돈은 주로 노동 계급한테서 받아냈기 때문에 점점 쌓이는 벌금을 갚지 못해 카운티 형무소 신세를 지게 되는 사람이 많았어. 세수를 늘리기 위해 가난을 범죄화한 거야. P.206
내가 똑똑하다는 아니 할아버지의 말은 나를 인정해주고 면죄를 시켜주는 말이었어. 내가 세상의 짐이 아닐 수도 있다고, 언젠가는 세상에 무언가를 내어줄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지. P.210
5. 지붕이 새는 집
가난한 여자들은 살아가기만 해도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어.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임신하고, 서빙을 하면서 예사로 성희롱을 당하고, 반복적인 육체노동으로 몸은 통증에 시달리지. 그리고 남자들에 의한 폭력이 있어. 가난한 계급 남자가 중간이나 상위 계급 남자보다 더 폭력적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경제적 수단이 없는 여자가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든 것은 사실이야. P.344
할머니는 진지한 말투로 자기를 묻을 때 브라 없이 묻어달라고 했어. 그 빌어먹을 거 지긋지긋해. 내 장례식에서 불태워도 돼.”
가난한 여자가 힘들게 살다보면 얻게 되는 냉정한 힘이 있어. 피해 의식 대신 건조한 유머를 얻게 된달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감상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모아놓은 동전을 손녀가 찾을 수 있게 손을 써놓지. 우리 이전의 여인들은 정신이 특히 맑고 또렷한 순간에 마치 여왕처럼 장엄한 힘을 드러냈어.
도러시, 베피, 푸드, 폴리, 지니 모두 살면서 겪는 심리적 고통 때문에 심오한 인식에 도달하게 됐지. 세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을 획득한 거야. 남자들이 설립해 논리와 지성만이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학교에서는 이런 지식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곤 해. 하지만 이 여인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보다 더 깊고 교회의 가르침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신의 직관을 확신했어. 삶에서 오는 고통을 그토록 오래 감내하면서도 망가지지 않을 수 있다면 ‘힘’이라고 불리는 걸 얻게 되기 때문이지.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