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son Perry <Playing to the gallery>
대학원을 휴학했던 때의 일입니다. 모처럼 자유시간이 생겼고 그때까지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뒤지던 중에 서울의 한 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했습니다. 별 고민 없이 바로 지원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주저하느라 놓쳤을 기회를 그때는 겁도 없이 덥석 물었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었나 봅니다. 옛 기무사 건물(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된 곳)이 개조되기 전에 진행되는 마지막 전시라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고요.
관람객들에게 전시된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경험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전시 규모가 꽤 컸습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가까이에서 그것도 공짜로 자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내뱉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는 관람객들을 볼 때면 마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일종의 연극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무사 지하 캄캄한 취조실에서 환하게 빛나는 대형 사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연극. 혼란스러움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빛. 모두 좋았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대미술(정확하게는 1980년대 이후의 동시대 미술)이 선사하는 생경한 자유를 맛본 저는 무턱대고 다음 전시의 도슨트 프로그램에도 지원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로 대표되는 YBAs(Young British Artists)에 속한 영국 작가의 개인전이었는데요. 종이를 구겨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다든가 화이트 큐브에서 누군가가 구토하거나 배변 중인 모습을 촬영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전시안내 교육 시간에 누군가의 배변 활동을 진지하게, 다같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숨죽이고 지켜본 경험에서 모종의 불쾌한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얘기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성으로는 이것도 예술이야 암 그렇고 말고 하면서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여전히 이건 아닌데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돈을 지불하고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에게 그 작업들의 의미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복학해야 하는 시기도 다가오고 해서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양해를 구하고 도슨트 교육을 중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또 한 번의 연극 무대에 설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랬다면 장르는 블랙 코미디 정도가 되었으려나요.
영국인 아티스트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는 그의 책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에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의 예술을 감상할 때 느낄 만한 당혹스러움에 대해 분석하고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신랄하게, 대부분의 경우 위트 있게. 책장을 넘기면서 이따금 등장하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아주 매력적인 책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Playing to the gallery’인데, 관용구로 사용되는 말로 해석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과장된 행동하기’ 정도가 될 것 같네요. 요즘 아티스트들이 예술을 하는 방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책의 부제가 ‘이해받는 데 애를 먹고 있는 동시대 미술 도와주기(Helping contemporary art in its struggle to be understood)’인 것을 보면 주류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확보한 그레이슨 페리 자신이 직접 동시대 미술을 변호하기도 하고 풍자하기도 하면서 예술계 안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라는 걸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레이슨 페리는 영국 예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에 하나인 터너 상을 수상할 정도로 주류 예술계의 인정을 받았고, BBC에서 예술과 관련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국에서는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는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주로 동시대 미술에서는 한물간 것으로 여겨져 좀처럼 다루지 않는 도자기와 태피스트리를 이용한 작업을 합니다. 불행했던 가족관계로 인해 어릴 때부터 종종 여장을 하기 시작해서 크로스드레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장을 할 때에는 그레이슨 대신 클레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하네요. 그레이슨 페리의 인터뷰 영상을 몇 개 찾아본 적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고 소탈하며, 냉소적이지 않으면서도 위트 있는 그의 성격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게 이 책을 읽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요.
이 책의 날개에도 적혀 있듯이 저자인 그레이슨 페리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좋은 예술은 무엇이고 나쁜 예술은 무엇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2) 어떤 것이 예술인지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점 말고. 3) 예술은 여전히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이미 놀랄 만한 것들은 다 보여준 게 아닐까? 그럼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이 책을 직접 읽으시면서 그레이슨 페리의 스타일을 꼼꼼하게 느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일러스트레이션들도.
좋은 예술은 무엇이고 나쁜 예술은 무엇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어떤 작품을 두고 좋은 예술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간단하게는 그 작품이 비싼가, 유명한 작가의 작품인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인가, 미학적인 정교함이 있는가와 같은 좀 더 복잡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답이 서로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죠.
그레이슨 페리는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 기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누가’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합니다. 아티스트, 평론가, 수집가, 거래상, 큐레이터, 그리고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지금 동시대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품의 평가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작품이 꼭 좋은 예술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의 취향은 후지다(Democracy has bad taste)고 말합니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아티스트들이 여러 나라에서 설문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원하는지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예술은 동물이 가운데 그려져 있는 파란색이 주를 이루는 풍경화였습니다. 그 결과는 굉장히 실망스러웠죠.
한편 저자는 동시대 미술계를 구성하는 소위 엘리트 집단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좋은 예술을 규정하는 기준은 작품의 질보다는 고급스러운 취향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하죠. 이 고급 취향이라는 것이 특정 사회적 계급 안에서만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어딘지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요. 마크 로스코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자신이 좀 더 고상하게 느껴지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예술인지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점 말고.
예술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동시대 미술에서 경계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전시 이래로 현대 미술은 끊임없이 지나간 예술의 관념과 형식을 부정하고 예술의 경계를 새롭게 확장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혁신해 왔습니다. 회화나 조각에 국한된 전통적 예술의 표현 방식은 주류 예술계에서 일찌감치 배척해야 할 낡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에서 팝아트,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20세기 예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철학적 논쟁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논쟁들 덕분(?)에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이제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유명 사진작가인 마틴 파(Martin Parr)에게 어떤 사진이 예술 사진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마틴 파에게 들은 대답은 이랬습니다. ‘글쎄, 크기가 2미터보다 크고 가격이 천만 원 이상이면 예술 사진이지.’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그레이슨 페리는 이외에도 어떤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시험할 수 있는 질문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중 조금 덜 진지한, 하지만 완전히 농담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기준 두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핸드백과 힙스터 테스트: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쓰고 싱글스피드 자전거 끌고 온 사람들이나 커다랗고 멋진 핸드백을 든 특권층 사모님들이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 때문에 뭔가 어리둥절해하거나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예술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쓰레기 하치장 테스트:
‘테스트 대상인 예술 작품을 쓰레기 하치장에 두었을 때,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는 왜 예술품이 버려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경우에만 그것은 예술 작품의 자격을 갖춘 것이 된다.’
예술은 여전히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이미 놀랄 만한 것들은 다 보여준 게 아닐까?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이젠 더 이상 제가 만든 이것 좀 보십시오, 당신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예술이 여기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동안 예술은 늘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써왔고 아티스트들도 그런 것에 짜릿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무엇은 상상하든 그것은 이미 다른 누군가가 시도한 적이 있는 것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레이슨 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 예술가들에게 오늘날의 최첨단 아이디어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피식거릴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란 현재의 트렌드를 살짝 비트는 것 정도라고 생각할 테니까. 미학적 대변동이니 문화적 격변이니 하는 건 오늘날의 예술에서는 상당히 예스러운 개념이다.’
예술은 끝을 맞이한 것일까요. 더 이상 아방가르드한 시도를 할 수 없다면, 이미 지나간 진부한 것들은 조금 바꾸는 일 밖에 할 수 없다면 예술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어느 정도는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새로운 예술이 주는 신선함과 해방감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간 덕분에 비로소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전의 예술이 지나치게 형식적 혁신에 집중한 나머지 작품에서 작가의 친밀한 목소리를 듣기 힘들었다면, 이제는 혁신에 대한 짐을 내려놓은 작가의 정직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작품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레이슨 페리가 도자기라는 형식을 택한 것이 예술로써 대단히 충격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저 장식을 위한 매체라 생각되어 좀처럼 동시대 미술에서 쓰지 않던 도자기를 활용해 작업한 것이 조금 의외라고 받아들이긴 했습니다. 그 정도 충격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레이슨 페리를 예술계에 발 붙일 수 있게 한 건 엄청난 쇼킹함이 아니라 도자기를 통해 풀어낸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클레어로 여장한 그레이슨의 모습이 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아무 맥락 없는 돌출 행동이라기보다 그의 가정사를 들어봤을 때 고개를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기에 사람들을 끄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되네요. 적지 않은 경우 개인의 상처는 창작의 모티브가 되고, 더 보편적인 사회, 경제, 정치적 부조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책에서 인용한 임상신경과학자 레이몬드 탈리스(Raymond Tallis)의 말을 인용합니다.
‘예술은 한 개인의 보편적인 상처를 표현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의미로 이루어진 유한한 삶을 살면서 받기 마련인 상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