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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환 Mar 28. 2023

일인자의 민낯은 아름다울 수 없다

지금 살아남은 승자의 이유

이전의 같은 작가가 썼던 '멀티팩터'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핫해진 몇몇 기업들이 말하는 본인들의 성공요인을 먼저 알려주고, 그런 공식적인 이유 말고도 [오히려 더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하기엔 그들 자신에게 그리 모양이 좋아 보이지는 않은]다른 여러 이유들이 더 있다는, 기업들이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가려진 살들을 들춰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기업의 성공신화에 있어서 본인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의 전략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라는 '지피지기' 느낌의 책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업계 1인자가 된 기업들이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 [책 제목처럼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경쟁자들을 물리쳐 왔는지에 대해 그들이 쓴 성공신화라는 두꺼운 화장을 지워주는 책인 것처럼 느껴졌다.

알고보면 지금 업계 1인자가 되기까지 이어져 온 그들의 행보가 기업이나 오너가 가지고 있는 좋은 이미지와는 꽤나 큰 괴리감이 있으며, 그 민낯은 [본인들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치열한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흉터들로 가득 차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작가도 기업들의 그런 행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성공한 기업들이 업계 1위가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까지 올라갔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성공하려면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도 그럴 수 있으면 그러라'는 건가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는 내내 '성공할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어느 정도의 [내가 생각하는]죄까지 저지를 수 있고, 또 얼마나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남양의 마케팅 방식이나, 게토레이의 탈취 조작사건,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타트업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든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나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피튀기는 경쟁사회 속에서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의 죄를 짓지 않았을 때 내가 손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송양공의 일화처럼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을 건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내가 정의하는]죄를 짓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떳떳하고 명예롭게 행동하다 죽으려 해도 나로 인해 함께 죽을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무능해서 본인들이 죽는 거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면 그런 소리를 듣게 됐을 때 내가 정의하는 그 명예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심도 들었다.


선과 악의 기준은 그것을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책에서 다루는 경쟁 기업 간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각자가 생각하는 각기 다른 선과 선끼리의 싸움일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제 3자입장에서 느끼기엔 그저 악과 악의 싸움인 것 같기도 하다. 남을 밟고 올라가지 않는 방식으로 성공하는 기업들이 분명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혁신이란 구산업의 대체와 파괴를 부른다'는 책 속의 말처럼 어떤 기업의 성공에 있어서 그 성공으로 인해 경쟁업체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사라지거나 도태되는 산업과 관련된 어떠한 기업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커다란 제로섬 게임이 자본주의의 현실인 것 같아 조금 씁쓸한 감정도 들었다.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군가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죄의식을 가지며 살아가기도 한다.

'안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라는 무적의 논리로 누군가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주는 선택과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들이 본인의 이야기에 대하여, 자신이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악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내용의 신화인냥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양실조가 만연하던 1950~1970년대에는 각 지자체에서 주관한 '우량아 선발대회'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남양유업에서는 이를 이용해 '1969년 서울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최우량아 전부가 남양분유를 먹고 자랐다'라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냈다.그러나 이는 허위 광고였고, 경고 조치를 받고도 다시 광고를 집행하다가 결국 서울시에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법적 리스크를 감수해도 좋을 만큼 우량아 연계 마케팅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뜻이다.
당시 나는 "스타트업 특유의 경쟁적인 성향이 작용한 결과 소시오패스 성향을 지닌 일부 스타트업 대표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라는 의견을 냈는데 이때 모임에 있던 스타트업 업계에 계신 분께서 이의를 제기했다. "작가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에 그분이 이런 말을 덧분쳤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겠죠."
나심 탈레브는 이러한 경향성을 인과관계의 정합성으로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내러티브 오류'라고 지적했다.게토레이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드는 몇 가지 지어낸 말로 게토레이에 인과관계를 부여했고 이는 신화가 되었다. 이후 게토레이가 얻은 경쟁력은 그 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시사한다. 일단 사람들이 그 스토리를 믿으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경쟁력이 된다. 이는 기업가와 마케터에게 스토리의 중요성을 알려주며, 성공하는 브랜드와 기업의 공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토리의 매우 강력한 영향력에는 어두운 측면도 존재한다. 로버트 케이드는 게토레이에 신화를 부여하기 위해 게토레이 탈취 사건을 조작했고, 성적의 차이를 성명하기 위해 제품의 구성비가 달라졌단 거짓말을 했다. 케이드의 이러한 행위는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되진 않았기에 개발 일화로 포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스토리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소비자의 후생을 떨어뜨리는 상품도 스토리로 팔려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개인으로서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태도일지 모르지만, 경쟁을 이끄는 리더로서는 무능한 것이다. 경쟁 상황이라는 것은 그만큼 다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기업과 사업체들의 생존이 걸려 있는 기업의 경쟁 또한 마찬가지다. 경쟁 상황에 걸맞은 태도와 자질 또한 평상시와 다를 수밖에 없다.
혁신은 구산업의 대체와 파괴를 부른다. 따라서 구산업의 보호는 그만큼 산업이 낙후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은 소비자와 선택과 이 선택을 받기위한 경쟁을 통해 발전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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