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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이사 Feb 14. 2020

상실이 녹아내리는 곳, 팔레스타인

영화 '스크루 드라이버'를 보고, 책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를 읽다. 




갈색 하늘 아래, 어느 흙빛의 옥상. 커터칼을 갖고 놀던 한 아이가 실수로 다른 아이를 살짝 베어 버린다. 당황스러운 정적도 잠시, 자기 피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본 아이가 곧장 주변에서 나뒹굴던 스크루 드라이버 하나를 낚아채 반격을 가한다. 피를 본 어린아이가 눈물보다 분노부터 표출해버리는 게 익숙한 곳, 영화는 1992년 팔레스타인의 임시수도 라말라에서 시작된다.



1. 순교자들의 무덤


10년 후인 2002년. 옥상에서 피를 나눈 뒤 둘도 없는 절친이 된 두 소년 지야드와 람지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스라엘인의 차를 훔쳐 타고 놀다 총격을 받는다. 스크루 드라이버를 들었던 그 소년, 람지가 목숨을 잃고 만다. 


'순교자'가 된 람지. 


죽은 순간부터 람지는 ‘순교자’로 불린다. 이스라엘의 총격에 목숨을 잃은 자들은 모두 그렇게 불린다. 그러나 사자(死者)의 어머니는 ‘순교자? 무슨 순교자! 내 아들이나 돌려줘!’하고 절규한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순교자 따윈 필요 없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살아있는 아들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무리드 바르구티의 책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속에도 '순교자'를 둘러싼 풍경이 등장한다.


「순교자가 점점 늘고, 장례식이 반복되고, 아부 타우피크가 외치는 “오, 우리의 아름다운 순교자!”라는 구절이 되풀이되면서 비극은 낯익은 일상이 되어 빛이 바랬다. 그것들은 날마다 겪는 슬픔 속을 파고든 어색한 희극처럼 되어버렸다. 죽음의 희극, 장례식의 희극. 싸움이 수십 년 이어지다 보니 용기와 굳건함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허무주의가 드리우고 운명은 아무렇게나 조소의 대상이 됐다. (p.234)」


람지는 과연 순교자인가? 지야드와 친구들이 차를 훔쳐 탄 건 일반적인 순교의 의미처럼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보단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 일탈을 꾀하려는 그 나이 때의 충동이 어우러져 만든 분위기에 취한 탓이 컸다. 그러나 공동체에게 중요한 건 람지가 죽게 된 원인보다, 그가 이스라엘인에게 죽임 당했단 결과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이스라엘과 반목하는 행위를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사람의 죽음을 '순교'로 통틀어 숭앙해왔던 팔레스타인의 분위기가 오늘날 람지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죽음 앞에 민족적인 '용기와 굳건함'은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냐는 물음이 람지의 어머니와, 스크린을 보는 관객과, 책 속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다


죽음이란 결과만을 순교자란 이름으로 부각하는 이 분위기는 곧 또 다른 사람의 삶도 빼앗아갈 예정이다. 람지가 죽은 뒤, 남은 친구들은 흥분되고 불안한 모습으로 즉각 복수에 나선다. 마치 람지가 스크루 드라이버를 들었던 때처럼,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셋이 인적 없는 도로에서 이스라엘인 하나를 쏜 뒤 도망치다 지야드가 혼자 잡혀 수감된다. 



2.  병든 영웅은 어디로


2017년, 지야드는 15년 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 석방된다. 영화가 자세히 언급하진 않지만, 관객들은 지야드가 감옥 안에서 겪어야 했을 고통을 어림짐작 해볼 수 있다. 사실 람지의 복수를 하자며 부추기다 사람까지 쏜 건 용케 잡히지 않고 달아난 친구들이었다. 휩쓸리듯 복수에 동참했던 지야드는 설상가상으로 취조받던 중에 자기들이 사실 동족인 아랍인을 쏴 죽였단 소리까지 듣게 된다. 시작부터 어떤 대의에 따라 움직인 게 아니었던데다, 이젠 '적'을 죽였단 걸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해 볼 수도 없는 상태. 15년의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시간이었을 테다. 그렇게 한 때 농구 유망주였던 지야드는 마르고, 예민하며, 말없이 의뭉스러운 성인이 되어 사회로 방출된다. 들어올 때처럼 강제적으로.


출소한 지야드를 처음 맞아주는 집과 동네와 사회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다. 주인공은 이스라엘에 항거한 ‘영웅’ 지야드.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고, 이스라엘인으로 오인 받아 총을 맞았다던 아랍인도 죽지 않고 나와 지야드의 '용기'를 칭찬하며 맞아준다. 그러나 모두가 반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들이 쏜 아랍인이 살아있단 사실을 들었음에도 지야드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아니, 그냥 신경도 안 쓴다.



지야드는 감옥을 나선 순간부터 내내 아프고 정신이 없을 뿐이다. 뭔가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콜라만 마시다 토하기를 반복한다. ‘머리를 파내는(digging) 듯한’ 고통이 계속되는 탓이다. 계속해서 들리는 삐- 하는 소리와 쿵쿵대는 소리,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몸, 어느 때건 불현 듯 찾아오는 불안감. 고문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징후다. 


그가 얼른 사회에 복귀하길 바라는 가족과 사회에겐 이런 지야드의 상태를 이해할 의지도, 도울 여력도 없다. 지야드가 15년 간 자리를 비운 사이 혼기가 늦어진 여동생은 오빠가 얼른 결혼하고 자리를 잡길 바란다. 여자친구를 소개해주는데도 반응이 미적지근한 오빠에게 불만이 많다. 


동생(왼쪽)과 소개 받은 여자친구(오른쪽) 사이에 선 지야드.

네 친구 중 하나였던 '문어(별명)'는 자기 대신 잡혀들어갔던 지야드에게 앞으로의 생활은 걱정 말라며 자신하지만, 얼마 못 가 PTSD때문에 건설현장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지야드와 다툰 후 그를 해고하고 만다. 


'영웅'의 삶은 '순교자'의 죽음만큼이나 헛되고도 괴롭다. 두 정체성 모두 팔레스타인 아무개의 존재가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든다. 영웅은 강하게 잘 살아야 하고, 순교자의 장례는 적에 대항한 승리 혹은 내세에서의 인정을 기리는 희극이 되어 마땅하다. 슬픔이 있다면, 그건 분노나 어떤 결기처럼 다른 어떤 것으로 포장돼야 한다.


현실은 다르다. 지야드는 왕년에 감옥을 다녀온 후 '영웅' 소릴 들었다던 아무개가 시장바닥에 천 하나 깔고 물건을 팔다 단속반에게 빼앗기는 걸 본다.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며 사정하다 말고 북받쳐 '이게 무슨 영웅 대접이냐'소리치던 '영웅'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다. 바삼 자르바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야드처럼 감옥에 다녀온 이들이 팔레스타인 전 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한다 전한다. 몸도 마음도 병든 '영웅'의 삶을 살아갈 법한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이다.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 지워진 사람들, 상처받은 '영웅'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단 마음이 영화의 시발점이었다. 




3. 새로운 팔레스타인을 만나며


지야드가 그나마 마음을 조금씩 여는 상대는 도시 안에 있는 도시 밖의 사람, 미나다. 미나는 팔레스타인 출신 부모를 둔 디아스포라이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다큐멘터리 감독.


「점령이 만들어 낸 세대들, 그들에게는 기억해야 할 빛깔과 냄새와 소리를 지닌 장소가 없다. 다른 누구에게보다 그들에게 속한 장소, 누덕누덕 기운 망명지의 기억을 떠나 되돌아갈 장소가 없다. 기억 속에 간직할 유년 시절의 침대, 푹신한 인형을 놓아두고 일어날 침대, 어른이 되면 더는 쓰지 않을 흰 베개를 무기처럼 들고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우당탕 몸싸움을 벌일 침대가 없다. 바로 이것이다. 점령은 공포와 핵미사일과 장벽과 경비병 들로 둘러싸인, 이해하지 못할 머나먼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 세대를 우리에게 남겼다. (p.92)」


팔레스타인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 중 한 사람인 미나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그녀에게 팔레스타인은 '(그곳이)조국이란 걸 알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땅, 사랑하는 땅이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표현대로 '순진하게', 팔레스타인의 일상에 섞여든다기보단 투쟁 같은 이상에 뜻을 품은 것처럼 보인다. 때론 그 불타는 마음이 때로 지야드의 삶에 거칠게 닿아 갈등을 빚기도 한다. 


미나: (지야드가 술을 마시고, 약한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 데 대해 항의하자)사람들이 뭘 보길 바라요? 
지야드: (화를 내며)동정심이나 사라고? 
미나: …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마시는 지야드와 다르게)난 고통을 모른단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동족과 술을 마셔요. 내가 싸우는 방식을 당신이 어떻게 정하죠? 당신도 실수로 감옥 간 거라며. 거울이나 봐요! 


열정이 넘치는 만큼 서투르기도 한 미나 캐릭터는 감독 자신이기도 하고,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분노부터 하고보는 또 다른 어딘가의 사람들을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내부의 시각과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게 되는 외부의 시각은 다르다. 독립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그 방법들도 제각각이다.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는 국제 정세에 종속된 처지이기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하나의 살아 있는 피조물이다(p.161).」


하지만 다르기에, 서로 부딪혔을 때 각자가 교류하며 새로워질 기회도 생기게 된다. 위에서처럼 싸운 후에도 미나는 다시 지야드를 찾아와 대화하고, 지야드도 인터뷰를 지속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인터뷰란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며 터놓는 시간이 곧 과거를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시도하는 시간이었으리라. 


외부인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만난다. 이스라엘을 향해 돌을 던지며 폭력으로 대응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팔레스타인에서 '다들 돌을 던질 때 자긴 그림이나 그린다'는 '사나드'다. 이스라엘을 향해 던진 돌은 해방을 가져오지 못했다. 지야드는 사나드를 만나던 중 문득 벽 앞에서 돌을 던지곤 했던 자신의, 혹은 팔레스타인인 아무개들의 과거를 본다. 사나드가 그리는 그림도 해방을 가져오지 못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 식으로 반응하는 삶을 택했다. 지야드도 사나드를 따라 같이 벽에 물감 풍선을 던져본다.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사나드가 그린 그림을 응시하는 지야드.


4. 팔레스타인의 굴레


여러 사람과 접하며 지야드의 상태가 나아지나 싶던 찰나, 지야드의 시선을 사로잡는 러너(Runner)가 다시 나타난다. 지야드가 석방되던 날 차 안에서부터, 이후엔 지야드의 상태가 나아지려 할 때마다 줄곧 보이던, 반팔 반바지를 입은 한 사내의 뒷모습. 나는 지야드가 찬란하던 자신의 청소년기 시절을 그리며 환영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다 와서야 지야드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람지!" 


죄책감, 그리움, 그 많은 감정들이 다 람지의 뒷모습을 만들고, 지야드를 붙잡게 한 것이리라. 매번 달리기가 느려 중간에 놓치고 말았던 람지를 끝까지 쫓던 지야드는 어느새 한적한 밤의 도로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의 도로다. 죽은 람지를 태우고 지났던, 다시 복수를 위해 찾았던, 그 시작과 끝의 도로.


황망해하며 서 있던 지야드 앞에 차 하나가 선다. 한 이스라엘인이 지야드를 동족으로 착각해 태워준 것이다. 지야드도 상황에 맞춰 히브리어를 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영토를 빼앗는 '정착민' 중의 한 사람인데, '적'치고는 나름대로의 애환이 있다. (세금이 너무 비싸서)세금을 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등, 죽으면 빚만 남을 거라는 둥, 아무 세금도 안 내도 된대서 정착촌으로 왔는데 좋지 않다는 둥. 새로운 이스라엘 정착민의 서사는 양면적이다. '적'이란 적대심에 가려왔던 일상적인 이웃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일상마저도 살아낼 수 없는 팔레스타인의 처지를 인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이 '이웃'이 아랍인을 욕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된다. '아랍인들, 시리아나 레바논으로 가 버리라지!' 하는 류의 말이 반복되던 어느 순간, 지야드가 아랍어로 외친다.


'여기 세워- 여기 세우라고!' 


고함과 함께 멈춘 차 안엔 팽팽한 정적이 흐른다. 

거기 한 손에 총을 쥐는 어느 이스라엘 사람과, 문고리 속의 스크루 드라이버를 그러잡은 지야드가 있다. 

누가 먼저 찌르거나 쏠 것인가. 둘은, 두 민족은, 어떤 선택과 엔딩을 만들어 갈 것인가. 



5. 에필로그


「점령하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마도 이것일 게다. 두려움과 담대함, 연약함과 무심함 등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복잡한 인격체. 그 애들이 '돌의 시'라 불렀던 시나 '돌의 아이들(인티파다에 참여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소년들)'과의 연대의 시라고 부르는 시 따위가 나는 이상했다. 그 시는 인간의 조건을 쉽게 단순화한다. 인간의 조건을 예찬하는 척하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의 조건을 명확히 보여 주는 대신 오히려 흐려 버린다(p.213).」


'돌의 아이들', '순교자', '영웅' 같은 정체성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한 데 모아 묵살시켜버린다. 인간의 죽음을 예찬하는 순간 '람지'는 사라지고, '순교자'만 남는다. 지야드도 그랬고, 수없이 죽어간 돌의 아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단순화된 정체성은 다시 공동체와 세대를 규정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위협이 미치는 영향과 부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아이들'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늘 싸우고 경계하며 복수하는 사이클 속을 헤매게 된 데에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책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아이가 죽으면 람지가 되고, 살아남으면 지야드가 되어 괴로워한다. 성급한, 충동적인, 극단적인 분노와 복수는 지야드의 버려진 삶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못할 결과를 낳는다. 


감독은 현실에서라면 '스크루 드라이버'의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나는 그 다음 상황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지만, 관객들의 선택사항이라고 봤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객들이 결정하길 바랐다. 
이건 열린 결말, 모호한 결말 같지만 사실 아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 이미 뉴스를 통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팔레스타인 사람이 살해당하는).
하지만 우리가 왜 살면서 이런 악순환에 매여야 하는지 관객들이 계속해서 생각해보길 바랐고, 또 관객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길 바랐다.
- 바삼 자르바위 감독 


아무 연고도 없는 외부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그 안에서는 해내기 어려운 생각들을 더 많이 시도해보는 게 아닐까. 그러려면 먼저 더 많이 듣고 상상할 줄 알아야 할 테다. 어떻게 분노와 복수의 사이클을 끊을 수 있을 것인가, 화해를 위해 스크루 드라이버를 들 수 있을 것인가. 갈등이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지야드를 기억함으로써 배우고 또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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