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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비 Oct 26. 2019

칭기즈칸- 제국의 지존

당신에게 몽골 #13

칭기즈칸 없는 몽골


상상할 수 있을까.

있다. 불과 이십 여 년 전만 해도 소련의 영향을 받던 몽골인민공화국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였다. 몽골인의 민족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몽골인의 이름에서 성을 없애기도 한 소련이었다. 칭기즈칸의 역사는 삭제되고, 그를 위한 어떤 의식이나 기념물도 있을 수가 없었다. 몽골 공산당 서열 3위의 투무르 오치르는 칭기즈칸의 800주년을 맞아 출생지인 헨티에 기념비를 세운 일로 좌천되었으며, 끝내는 피살되었다.


그 때문인지 몽골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나 칭기즈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1990년에 헌법이 개정되면서 칭기즈칸에 대한 복권이 이뤄졌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칭기즈칸이 대세이다. 몽골에서 물건을 살 때 잘 모르면, 칭기즈칸이 붙은 상품이 최상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보드카부터 호텔에 이르기까지 칭기즈칸은 몽골의 자존심이며, 극상의 존재로 부활하였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선정한 ‘밀레니엄 맨’으로 칭기즈칸이 선정되었다. 지난 천년동안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칭기즈칸은 내부적으로는 몽골고원에 산재되어 지리멸렬하던 몽골족을 하나로 모아 대원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바깥으로는 안정적인 초원 실크로드의 교역로를 확보하여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칭기즈칸의 생애는 드라마틱하다.

그는 아버지가 약탈한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메르키트 족에게 시집을 가던 옹기라트족의 신부 후엘룬을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는다. 칭기즈칸의 이름 테무친은 아버지가 죽인 적장의 이름이다. 금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타타르족은 주기적으로 몽골부족을 사냥했다. 그런 타타르족에 맞서 몽골부족의 단합을 위해 애쓰던 아버지 예수게이는 결국 약탈혼이 빌미가 되어 독살 당한다. 

몽골의 관습상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처로 삼아야 했지만 보복을 두려워한 동생들은 아무도 그녀를 거두지 않았다. 거친 광야에서 남편 없이 산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강인한 어머니 후엘룬은 들쥐를 잡아먹으며 남편 없이도 자식들을 길러낸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자란 테무친은 무수한 시련을 이기고 황금 씨족을 이끌어간다. 사냥거리를 혼자 먹은 동생을 활로 쏘아 죽인 테무친에게 충격을 받아, 어머니는 그에게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을 뼈저리게 가르친다. 그렇게 자란 테무친은 의형제 쟈무카를 비롯하여 보오르추, 무칼리, 티라운, 보로클로 상징되는 4준마와 젤메, 수부타이, 제베, 쿠빌라이로 대변되는 4맹견을 거느리고 제국을 이룩한다. 

1206년, 테무친은 오논 강가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흰 깃발을 들고 흩어졌던 부족들을 하나로 모은다. 이 자리에서 텝 텡그리 샤먼으로부터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에케 몽골 울루스(대몽골국)’의 탄생이다.‘칭기스’는 바다를 뜻하는 ‘텡기스’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바다가 없는 몽골 사람들에게 바다는 우주나 다름없는 큰 세상을 뜻했다. 바다와 같은 왕,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뜻이다. 


제국을 경영하면서도 ‘몽골 울루스’에는 법이 없었다. 칭기즈칸의 말이 법이었다. 조악하고 단순한 몇 마디만으로도 제국을 다스린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용서 아니면 사형이라는 법령의 힘이었다. 그의 어록을 모은 법령 빌릭은 긴 말이 필요 없다.  

제1조 :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2조 : 수간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19조 : 남편이 싸움에서 달아나면 부인이 남편을 대신하여 싸워야 한다. 

제29조 : 말을 훔친 자는 아홉 마리를 변상한다. 변상할 말이 없으면 아들을 내주어야 한다. 아들도 없으면 양처럼 본인이 도살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얼마나 엄중하고 단순무식한 법령인가. 초원에 흩어져 바람처럼 떠돌던 몽골부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긴 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칭기즈칸이 그런 무자비한 극형만으로 다스린 것은 아니다. 


제13조 : 음식을 먹는 사람의 옆을 지나가는 손님은 말에서 내려 주인의 허락 없이도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주인은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제15조 :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빨래를 해서는 안 된다.

제35조 :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생모를 제외한 모든 처첩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결혼을 해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도 좋다.


길손부터 과부며 빨래까지 챙기는 자상함도 겸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의 부인을 약탈한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업보는 자식 칭기즈칸에게도 이어진다. 칭기즈칸의 처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된다. 그녀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몸속에는 원수 메르키트족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어찌 할 것인가. 테무친은 보르테가 낳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조르치’였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죽음을 앞둔 칭기즈칸은 사후에 자식들 간에 일어날 골육상쟁을 내다보고, 전쟁터에 나가 있던 맏아들 ‘손님(조르치)’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조르치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채고 응하지 않는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이루었으나, 자식들의 우애는 이끌지 못했다.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말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따라 후대의 왕들은 계절마다 궁을 옮겨서 살았으며, 중국의 문화를 동경한 쿠빌라이 때에 이르러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며 벽돌로 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원제국은 칭기즈칸의 예언대로 망하고 만다.


서하(西夏)를 정벌하러 원정길에 나선 노령의 칭기즈칸은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눕는다. 1227년의 일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거느렸으며, 동서양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대군주도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묻힌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비밀에 부치라고 유언했다. 지금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시신을 운구하는 동안 길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를 묻은 땅은 천 마리의 말로 밟아서 흔적을 없앴다. 그 말 등에 올라타서 달리던 병사들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칭기즈칸은 묻혔다. 지금도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는 ‘툼 레인저’들은, 칭기즈칸이 원대한 꿈을 키우던 부르칸 칼둔 부근에 묻혔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구미가 당기지 않은가. 

     

칭기즈칸은 어째서 전쟁을 끝없이 일으켰을까. 

여축된 삶을 살지 못하던 유목민들은 이상기온이나 천재로 인해 살기가 어려워지면 농경민들의 곡식창고를 털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칭기즈칸이 강대한 제국을 이룬 뒤에도, 나라를 유지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필품이 필수적이었다. 그 물품의 대부분을 서역의 상단에게서 보급 받던 처지에, 툭하면 통행세를 올리거나, 약탈을 일삼는 실크로드의 주변국가들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역참을 두어 안정된 교역로를 확보하는 한편, 일방적으로 배를 불리는 서역의 교역을 바로잡기 위해 전쟁을 망설이지 않았다. 칭기즈칸에게 전쟁은 앉아서 죽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칭기즈칸은 용감한 만큼 잔혹했다.

칭기즈칸은 몽골 사람들의 표상인 ‘푸른 늑대’처럼 영리하고 용감했다. 그가 20만의 군대로 수백만의 적들을 격파한 데에는 용감함과 더불어 능란한 심리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상인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여 적진에 엄청난 심리적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는 본보기를 보이듯이 저항하는 적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다. 사람은 고기를 먹고, 가축은 풀을 먹는다고 믿었던 몽골인들의 의식에서, 농사를 짓던 이민족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인식되었다.  

메르키트족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일생동안 이어진 무수한 전쟁에서 보인 끔찍한 학살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넘어선다. ‘사냥에 나가면 짐승을 많이 잡아야 하고, 전쟁에 나가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대로, 그는 전쟁을 인간 사냥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정복한 지역의 여자를 취하기 위하여 그 남편을 죽이고, 타타르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수레바퀴 높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모조리 살육한 행위는 잔혹했다. 수많은 전쟁 중에 그의 전술은 고도의 이간과 심리전을 병행하였다.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지만, 저항할 경우 멸족을 시키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의 손자가 죽은 샤리 골골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를 공격할 때는, 풀 한 포기조차 살려두지 않았고, 돌 위에 돌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렸다. 그의 잔혹함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으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척박한 황야의 법칙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자취를 밟으려는 여행자라면 몽골 동부의 헨티 아이막으로 길을 잡아야 할 것이다. 우선 칭기즈칸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다달(Dadal) 솜과, 테무친이 처음으로 ‘칸’ 자리에 즉위한 ‘흐흐 노르(Khokh nuur)’와, 40미터 높이로 최근에 칭기즈칸 동상이 세워진 날라이흐 근교의 ‘촌징 볼독(Tsonjin Boldog)'을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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