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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노스 최민호 Feb 24. 2019

색깔로 주신 세뱃돈

색깔로 주신 세뱃돈 

   

1.     


‘누군가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가 있어 커튼을 젖혔더니, 흰나비가 하늘 가득히 날아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탄성으로 나비들을 맞이하였다. 가만히 다가와 잠들 듯 날개를 접는 나비들.


새벽부터 흰나비가 눈이 되어 온 세상에 춤을 춘다. 

점점이 사락사락 하늘을 배색으로 무채색의 그림을 그린다.

점묘화.

붓끝으로 흰색 물감을 일일이 찍어 세상의 색깔을 다시 입힌다. 

녹고 쌓이고 번지면서 명도도, 채도도, 구도마저 무시한 대가의 화필은 하늘의 메시지를 한 점의 빈틈도 없이 온 누리에 내려줌에 풍성하기만 하다.     


산은 아스라이 보이고 들은 들이닥쳐 보이는 언덕 위, 통 유리의 거실문을 통해 나는 쇠라의 명작을 보듯 눈발이 그려내는 거대한 산수화를 온몸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2.     


설 날 아침이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눈을 상서로운 눈이라고 하였던가.

곧, 은덕처럼 어깨에 쌓인 흰 눈을 털며 아이들이 들이닥치겠지. 

색깔 선한 한복으로 단장해 입고 복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서 달려 올 손주들. 

시집간 누이동생 가족들... 아들 딸들.  

모두들 고운 눈을 하고 공손히 세배를 하겠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소원 성취하거라.’     


그리고 내주는 세배 봉투. 받아 드는 아이들의 손이 공손하게 떨린다.  

상큼하고 산뜻한 세뱃돈. 이보다 더 신나는 신선함이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세배만으로도 주머니에 복이 가득 찰 것이건만, 하늘은 설 날의 대지에 하얀 축복마저 내려 주고 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연하장의 그림이 바로 저런 풍경이었지. 

점점이 흩날리는 흰 눈 내리는 그림 위에 떠오르는 그림이 또 하나 있다. 

아버지...     


3.     


나는 설 날이 싫었다. 

추석이다 뭐다 하는 명절도 싫었지만, 설 날은 가장 싫었다.

명절 연휴가 되면 우리 가족은 새장에 갇힌 비둘기처럼 갈 곳 없이 주둥이로 깃털만 쪼아대며 새장 속만 맴돌았다.     

일가친척이란 아무도 없이 부모님과 나와 누이동생. 

차례를 지낸다, 시골 할머니 집을 간다는 친구들의 부산한 이야기며, 명절 음식이 어떻고, 귀성길 도로가 어떻고 하는 떠들썩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 가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머니가 해주는 별로 맛도 없는 명절 음식만 먹으며 눈만 둥그렇게 뜨고 지루한 휴일을 보냈다. 

명절날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밖으로 불러내기도 머쓱했다.  

어쩌다 친구 집에 전화를 하면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란들. 

그 신나는 흥분된 잡음이 듣기 싫었다. 부럽고 질투가 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 때 피난 온 분들이었다.  

피난 후 만난 분들인지라 형제도 친척도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 흔하디 흔한 이모, 고모, 삼촌이라는 단어를 나는 입 밖에 내어 불러본 적이 없었다. 누이동생과 남매뿐이니 명절이면 어딘가 가야 한다고 친구들이 동동거릴 때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우리끼리 얼굴만 보았다.      


설 날 다음날 외로움은 더 했다. 

큰 아버지에게 얼마, 작은 엄마에게 얼마 하면서 세뱃돈 자랑을 하며 두둑이 한몫 잡은 친구들의 영웅담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설 날과 세뱃돈이 저주스러웠다. 

내가 받은 것이라곤 고작...          


4.     


우리 집은 넉넉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화가였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마른 체구에 눈이 깊은 준수한 분이었다.  

빵떡모자를 머리에 얹고 아스라이 펼쳐지는 경치를 호수에 담을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풍경화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외로운 청년의 눈빛을 보고 반하지 않을 처녀는 없어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없는 외로운 공허를 두 분은 서로를 만나며 메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아버지는 옛날에 대단한 지주의 가문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시절에 그림을 공부하였다는 것은 그만한 집안의 자제 아니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는 추론이 대단한 아버지 가문의 정황 증거이겠으나, 재산 많은 귀공자의 사치스러운 도락으로 아버지가 그림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아버지는 천재였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외국에서 그림 공부를 오래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무의미했다. 어머니와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그래서 친구들의 아버지보다 몇 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젊은 아버지와 목말을 타고 뒹굴며 노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아버지는 과묵하셨고 생각해보면 매우 보수적이었고, 또 생각해보면 매우 진보적이었다. 

아버지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묵직한 중력 같은 것이 있어 내면의 흔들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할수록 당겨지는 끌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맹목적이었고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난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릴 뿐 돈을 벌려하시지 않았다.

어쩌다, 정말 이따금 아버지는 외국에서 친구가 보내주었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돈을 건네주시기도 하였는데 달러 아니면 프랑화였다. 액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아버지 그림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일일이 점을 찍어 그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 완성하곤 하였지만, 무엇을 그린 것인지 나의 안목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화방, 아틀리에라고 하기에는 계면쩍은 작은 골방에는 차곡차곡 포개 놓은 그림들이 많았지만, 나는 유화에서 나오는 그 냄새가 싫어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괴짜라고 여겼고, 그것은 어느 설 날 때부터였다.     


5.     


그해 설 날.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렸다. 

응당 작은 봉투에 세뱃돈을 주시던 아버지가 그 해는 커다랗고 두툼한 사각봉투를 꺼내 놓으셨다. 봉투를 개봉하여 보았다. 그림이었다. 작은 액자에 들어갈 정도의 종이에 그려진 수채화였다.      

들판에 누런 소가 멍청하게 서서 개울가의 개구리와 올챙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소는 눈을 크게 뜨고 코에는 코뚜레가 꿰어져 있었다.

푸른 들판, 누런 소, 소를 올려다보는 개구리의 모습은 모두 무수한 색 점을 찍어 묘사한 모자이크식의 그림이었는데 살아있는 듯 정교하였다. 

개구리는 청개구리였다.   

아버지의 이런 그림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세배를 하고 돈을 받는 것은 저급한 짓이다. 너도 이제 철이 들 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세뱃돈보다는 세뱃그림을 받아라.

너에게 교훈이 되는 세뱃글을 써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아버지는 글재주가 없어서 그림으로 대신한다. 새겨 두거라.”     


‘소처럼 우직하게...., 천방지축 팔딱거리는 개구리는 언젠가 소 발에 밟히리라...’     


그림은 나를 보는 아버지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경박하고 참을성 없이 까불었다는 생각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청개구리는 나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세뱃돈은 그때부터 없어졌다. 아버지는,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주는 풍습은 선비의 가문에는 없었느니라.

섣달 그믐날에 제웅을 만들어 집안의 액을 집어넣고 대문 밖에 내놓으면 그걸 누군가 주우라고 제웅 속에 돈을 넣어 둔 것이 세뱃돈의 유래라고 한다지만,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세배 오는 손님에게 떡국이나 음식을 대접했을지언정, 절을 한다고 돈을 주다니.... 돈이 아무리 좋은 들 천박하기는 일반이다.

선비는 모름지기 돈을 멀리 하였느니, 세뱃글을 써주었지. 아이들이 한 해 동안 마음에 새길 글을 써서 봉투에 넣어 주었지...

세뱃글로 옳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지. 돈이라니...”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무척 어려웠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싫었다. 

내로라했다는 선비집안의 오만한 내력도 싫었고, 세뱃돈 받고 입이 함박만 해지는 동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양반의 무정함이 싫었고, 물정 모르고 그림만 그리며 어머니 고생시키는 무심함이 싫었다.

설이 지나 세뱃돈 자랑을 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보여줄 것이 없었다.

그림? 그 부끄러운 그림을 보여줄 수는 더욱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잊어버린 척 그림을 내팽개쳐 버렸다. 

설 날이 가까워오면 아버지는 화방에서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이 세뱃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라는 걸 나와 누이동생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설 날이면 세배를 드렸고, 아버지는 세뱃그림을 주셨고, 나는 슬그머니 그림을 팽개쳤다.      


대학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주신 세뱃그림은 특이했다.

화면 가득 잔디밭과 강이 흐르는 공원을 배경을 한 그림이었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공원은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작품에 나오는 배경이었다. 강과 잔디밭과 나무가 그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도 그림 한 복판에 둥근 밥상이 위아래로 세 개가 포개져 있는 그림이었다. 

상은 옻칠이 반짝거리는 새것이었다. 각도에 따라 상의 색깔이 미묘하게 변해 보였다.       


“새 세상이다.”     


아버지의 설명은 간단했다. 묘한 표현이었다. 다의적인 의미와 색깔을 담은 그림이었다. 상의 색깔이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붉은 색깔 점과 파란 색깔 점을 찍다 보면 보라색깔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는데, 그것은 점묘 화법의 특성이었다. 빛과 점의 혼합으로 색깔은 다양하게 변한다.      


‘새 · 세 · 상’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아버지는 상(賞)으로 상(床)을 올려(上) 주셨다.

새 상이 세 개. 

보는 방향에 따라 나에게 다가올 새 세상은 항시 변할 뿐만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날 나는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공원에서 새 세상을 보았다.      


6.     


우리에게 해마다 주시던 세뱃그림은 그렇게 구체적인 형상을 그린 구상화였지만, 평소의 아버지의 그림은 추상적인 것이었다. 

아버지는 불현듯 작품을 싸들고 어디론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시곤 했는데, 오실 적에는 풍성한 선물을 사 오곤 하셨다. 외국의 진기한 선물과 화려하고 에그조틱한 각종 액세서리, 화장품 선물에 어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정신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평판과 형편이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그림은 한국에서 쉽게 이해될 것은 아닌 듯했다.       


세뱃그림이 점점 아버지 화풍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세뱃그림은 추상화로 변하고 있었다. 

나의 성장과 비례하여 그림에 어떤 의미를 담아 그려주시고 있다는 것을 모를 바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읽어낼 자양분이 없었다. 나는 나의 평범함과 둔재성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샤갈이 그린 ‘나와 마을’이 러시아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추상성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갔다고 하더라도 피카소의 저 추상화는 어찌하여 명화라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젊은 시절의 피카소가 좋았다.  

비인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의 미술관에서 피카소가 아주 젊은 시절 그렸다는 귀부인의 초상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섬세하고 강렬한 빛과 어둠을 조화시킨 치밀한 필치. 추상성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없는 정확한 묘사. 그의 천재성에 넋을 잃고 감명을 받았지만, 나는 그 후의 추상화에는 어떤 감동도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림의 형상과 의미를 연결시켜 해석하지 못하는 나는 아버지의 유전자가 어찌하여 내 속에는 한 조각도 섞여있지 않을까 개탄했다. 

심미안도 없는 속물이요, 무식함과 무감각이 범벅된 지진아 같기만 했다. 아버지의 아들이면서도...     

화가의 피를 이어받지도 못하고, 부질없이 돈에 주리고, 난해하고 공허한 허구적 추상에 넌더리가 났던 나는 경영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였다. 돈....  


어느 날 아버지에게 넌지시, 비스듬하게 물었다.       


“아버지 ‘그림’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요? 저 알 수 없는 그림으로...”     


아버지는 나를 그윽이 바라보셨다. 나의 시니컬한 눈빛을 읽으셨는지,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한, 아니 대견하다는듯한 눈빛이었다.      


“시(詩)가 무엇이겠느냐?”     


“언어의 축약된 표현이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셨다.     


“틀렸다. 축약된 언어가 시는 아니다. 메타포, 은유가 시라고 하는 것이다.”     


“메타포... 은유?...”     


“만일 누군가가 ‘세상은 그 사람의 스위치를 뽑았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사회적인 매장? 매몰?...”     


“그렇지. 죽음... 그것이 시가 되는 언어다.

시란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쓰지 않은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럼으로 더 풍부해진다. 표현이...

그러나 스위치를 뽑은 것이 죽음일까? 속박에서 자유로와진다는 의미로 새길 수는 없을까? 모두가 전기코드를 머릿속에 박고 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은 색깔로 그리는 시라 할 수 있다.”     


아버지는 그림이란 ‘색깔로 거는 말’이라고도 했다. 

시보다 더 싯적인 메타포라 했다. 

‘화가란 그림으로 그리는 시인’이라 하였다.      


‘표현이 풍부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풍부’를 ‘모호’라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뒤적뒤적 구겨진 종이를 꺼내셨다.  

프랑스의 현대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라 했다.      


 <자유지역>     


난 군모를 새장 속에 넣어 두고

새를 머리 위에 얹은 채 외출했네.

그때

이젠 경례도 안 할 건가 하고

지휘관이 물었네.

네. 이제 경례는 안 합니다 하고

새가 대답했네.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경례를 해야 되는 줄 알았지요 하고

지휘관이 말했네.

괜찮습니다.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하고

새가 말했네.     


묘했다. 경쾌한 반란이 모색되는 반항심... 은근히 켕기는 속에 후련한 한줄기가 있었다. 그 후련한 한줄기가 ‘자유’인가? 

아버지가 이번에는 그림 한 점을 보여주셨다.

마치 유치원 어린이가 생각 없이 그린 듯 유치하고 서툰 그림이었다. 

점점이 물감으로 찍어서 그린 그림이어서인지 애매하고 불분명했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병정놀이 장난감 군인들이 윗 계단에 있는 사람에게 일사불란하게 서서 경례를 하고 있다. 장난감 군인들의 가슴에는 각기 두서없이 계급장이 그려져 있다. 별이 여럿 그려진 장군도 아래 계단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기수가 깃발을 계단을 따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깃발마다 다른 색깔,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위인들의 얼굴 그림이었다. 맨 윗 계단에서 깃발 하나가 우뚝 서서 힘차게 휘날린다.     


“어떤 느낌인가?”     


나는 군인들이 역사적 위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경례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 그런 느낌도 들겠지... 

그런데 깃발들은 위인의 얼굴이 그려진 지폐다...”     


과연, 조지 워싱톤이 그려진 깃발이 맨 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달러였다.      


“네가 몸 닫고 있는 그 사회의 계단은 돈이 계급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 그림은 정교하게 그리면 만화가 된다. 유치하게, 심플하게...”     


아버지는 시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린 것이라 했다.     


7.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한 뒤, 나는 슬그머니 아버지가 그려준 세뱃그림을 찾아보았다. 거의 없었다. 

소홀히 생각했었다. 세뱃돈을 못 받았던 반감에서였을까? 나는 그림들을 팽개쳐두고 방기 했었다. 

서가의 책 한 페이지 구석에서 그림을 한 장 발견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맨 처음 받았던 소와 개구리 그림이었다. 

기억이 생생하였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청개구리처럼 말썽 부리며 고집부리며 말을 안 듣던 아들에게 처음 주신 세뱃그림이었다.     

누런 소의 코에 꿰어져 있는 코뚜레... 냇물가에서 소를 올려다보고 있는 개구리와 올챙이.      


‘소처럼 우직하게...., 천방지축 팔딱거리는 개구리는 언젠가 소 발에 밟히리라...’     


라고 하셨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다시 바라본 오래된 그 그림에서 내 눈길은 개구리보다 소의 코뚜레에 가서 꽂혔다. 코뚜레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소는 코가 꿰어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자유롭지 못할까?


소의 코뚜레...

어린아이도 황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저 코뚜레로 인한 것이다.     

얼마 전, 시골친구 집에 갔다가 대문 옆 벽에 걸려있는 코뚜레를 보았다. 

소를 키우지도 않는 집에서 웬 코뚜레인가 싶어 연유를 물어봤더니 친구는 그것은 집안의 부적이라 하였다. 

코뚜레는 향나무로 만들었다. 고통스럽게 코를 뚫어 꿰이는 소에게 좋은 향기라도 선사하고 싶은 것이 조상들의 배려심이었던가.

대문이나 방문 위에 소코뚜레를 걸어 놓으면 액을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하였다. 바람피우는 남편의 옷장에 코뚜레를 숨겨두면 가정으로 돌아오고, 자손이 번성하며,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소는 집안의 살림밑천이요, 코뚜레는 밑천을 지키는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그림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청개구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코뚜레로 엮은 소라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없으면 집안의 가장, 책임을 지는 집안 기둥이 되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마음을 어지럽히는 개구리와 올챙이쯤은 밟아버리라는 뜻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어릴 적 본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내 앞에 있었다.  

그림은 내 마음이 그리는 대로 대답했다.       


‘그림이란 색깔로 거는 말’. 

‘화가란 그림으로 그리는 시인’.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고 계셨다.      


‘아들아. 어떻게 살고 있니?’     


나는 소중히 그 소 그림을 액자를 해서 걸어두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세뱃그림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하신 말이 기억났다.      


“그림은 원작을 보아야 한다. 

종이에 그린 것인지, 캔버스인지, 나무에 그린 것인지, 파스텔로 그렸는지, 물감이나 유화로, 또는 연필이나 펜으로 그린 것인지, 그 질감의 느낌은 전혀 다르기만 하다. 

크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오그라지는 듯한 역사의 대 현장을 그린 거대한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을 엽서만 한 크기로 볼 때 그 위압감과 시대의 무게감을 읽을 수 있겠는가? 정교한 사진으로 보았다고 그 그림을 본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점차 다르게 다가왔다. 

어느 사이엔가 나의 관심과 버릇도 바뀌기 시작했다.       


시도되지 않았던 도전이라는 관점으로 창조된 그림이 화가에 대한 중요한 평가의 요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화가들 자신끼리의 리그일 뿐,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람자에게는 늘 동떨어진 구경거리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그림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저 그림을 통해 화가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 것일까?’     


그림과 혹은 화가와 대화한다는 것은 걸어가면서 눈으로 일별 하는 감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원작을 굳이 찾았다.

그림에 말을 걸어 보았다.  

쳐다보면 볼수록 대답하고자 머뭇거리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 속에는 화가의 영혼이 속삭이고자 하는 빛과 색깔이 있었다. 

한참을 서서 그렇게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그림으로 그린 시인의 속삭임이 들린다...     


나는 피카소의 고뇌가 읽히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나 반 다이크처럼 실물보다 더 인상적인 실물을 그려내 영혼을 울렸던 시대는 흘러갔다.  

세월이 갈수록 발전하는 그림보다 더 정교한 사진, 사진보다 그림을 더 정확히 그릴 수는 없었다.      

빛과 그림자와 구름과 바람을 대하며 몇 달간을 풍광 속에 앉아 붓을 빨아가며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한순간에 찍어내는 사진 영상과는 다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데생을 하는 순간부터 고뇌에 빠져든다. 자신만의 시어를 찾기 위해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그린 추상화도 태어났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그리는 비구상 화가도 태어났다. 

걷잡을 없이 그림이 변모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몸부림 속에서 잉태되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었기 때문이리라. 

비로소 피카소도, 몬드리안도 칸딘스키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뜨거운 추상화... 차가운 추상화...      


내가 말없이 미술관에 가서 오랜 시간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것은 아버지의 아방가르드(전위)적 은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내 속에 있는 아버지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미학적 유전자가 내 핏줄에도 가늘게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나는 딜레탕트(애호가)일망정, 아티스트(예술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 속에 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오래 사시지 못했다. 

점묘화의 장점은 효율적인 명암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지만 손으로 일일이 그려야 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힘이 든다. 

며칠이고 화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아버지를 기억해 볼 때, 조르주 쇠라가 31세로 요절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날, 핏줄은 가늘어도 끊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딸이었다. 

딸이 재미 삼아 긋는 연필심 속에 나는 올곧이 살아있는 아버지의 핏줄을 발견하였다. 딸은 미술에 뛰어난 수월성을 보였다. 할아버지가 세대를 뛰어넘어 부활한 듯했다. 딸은 미대에 진학하였고 점묘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딸은 점묘화는 미술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생명력이 무한한 그림이라고 강조했다. 그림도 화가도 끊임없이 진화한다.   

터키의 차타이 오다바스는 사진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을 디지털 방식으로 활용한 점묘화로 유명한 인사들의 얼굴을 그려 큰 인기를 끌었다.       

원시인들이 바위 위에 그린 암각화가 돌로 콕콕 찍어 그린 점묘화요, 사진이 생기기 전 생물학자들이 관찰대상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화법이 점묘화요, 신문이든 책이든 인쇄물은 점의 밀도를 통해 표출되는 점묘화요, 텔레비전 모니터도 영화도 점묘가 얼마나 세밀하냐에 따라 해상도라는 이름으로 평가되는 점묘화라고 했다. 

수만 광년 전의 빛도 입자로 들어와 미지의 미래로 기록된다... 점묘였다.     


나는 점묘화 작품전이나 신인상파 또는 디지털 점묘화 전시가 있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관람하곤 했다. 기회가 되어 프랑스에 가면 미술관 관람은 필수였다.  

프랑스는 미술관이 많았다. 19세기 점묘 화법의 조르주 쇠라나 폴 시냑 작품 전시회가 있으면 기를 쓰고 찾아갔다.      


어느 날, 햇빛이 밝은 날이었다.  

신인상파 특별전이 있었던 지베르니 미술관에서 천천히 빛의 작품들을 감상하던 나는 한 작품을 보고 숨을 뱉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빛을 감각 요소로 조명한 신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 번개 빛처럼 나의 동공을 마비시키는 작품이 있었다.       

저 작품...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공원에 놓여있는 동양식 밥상 세 개...

그 그림이 중앙의 전시 벽에 당당하게 걸려 있는 것이었다. 

눈에 익은 아버지의 사인이 선명하게도 그림의 왼쪽 귀퉁이에 새겨져 있었다. 

조명 때문인지 세 개의 상은 각도에 따라 빛깔이 변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그려준 세뱃그림이었다. 

이곳에 어떻게 저 그림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버지의 그림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8.     


천재는 요절한다더니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급성 혈액암이었다. 백혈병은 골수를 이식하지 않으면 치료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이식할 골수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 파리의 미술관에서 아버지의 작품을 대하다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곳에 계시다니... 나는 부랴부랴 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딸이 한달음에 파리로 날아와 할아버지의 그림을 보았다. 딸은 그림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아연해하며 물었다.      

“이 화가가 우리 할아버지세요?”     


나도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럼... 그럼... 내가 이 그림을 집에 가지고 있어. 대학 들어갈 때 세뱃그림으로 주신 그림이야...”     


“녜?! 이 분이...?”     


그리고 딸은 벼락같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이 분은 우리 과 교과서에 나오는 분이에요. 프랑스에서 활동하시는 아방가르드 점묘 추상화가.... 이 

분이 할아버지라고요?”     


나는 정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국내에서 아무 이름도 없던 아버지가 프랑스 작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다. 딸과 함께 미술관장을 찾아가 들은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분은 수수께끼의 화가입니다. 일찍이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가끔 나타나 작품들을 선보이곤 했는데 걸작이었죠. 한 때는 갤러리 최고의 인기 작품이었습니다. 추상화라고 하지만, 추상성 속에 다양한 견해가 숨어있었어요. 은유의 메타포가 신비했죠. 그리곤 영영 사라졌습니다.

저 공원의 상 그림도 그렇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나와 너와 우리, 동양과 서양과 세계... 세 개의 구비된 요소들이 함축되어 신비롭게 나타나 있죠.  

그의 작품이 더 나온다면 좋을 텐데...”     


나는 나의 무신경을 우매함으로 이토록 저주한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도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세뱃돈을 못 받았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뒤덮고  있었다.

가슴을 치며 아버지의 작품을 찾아보았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곤 불과 몇 점....     

‘공원 안의 새 세 상 그림’이 남아 있었던 것도 천만 기적이었다.  


가슴을 치며 아버지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누이동생에게 고백했다. 고백하는 것이 죄의 사함을 받는 길이라 여겨졌다.

시집간 누이동생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였다고...?”     


“그렇단다. 그런데 불효 막심한 이 아들놈은 아버지 그림을 다 없애버렸으니...”     


“아버지의 어떤 그림? 화방에 있는 그림? 아니면...?”     


“세뱃그림...”     


누이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세뱃그림은 나에게도 그려주셨어. 해마다 설 날에...”     


“그러셨지. 물론이지.”     


“오빠는 그 그림을 다 없앴어?”     


나는 속절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하나도 안 없앴어.. 책갈피에 그대로 다 끼워두었는걸...

결혼할 때 그 그림으로 나는 병풍을 만들었어. 아버지의 유품이라서...

그리고 화방에 있던 그림도 아버지가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다 주셨어.

오빠는 청개구리처럼 모른다고...”     


9.     


나의 참담함과 부끄러움으로 범벅된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그리고 구원의 그 기쁨을...     

우리는 파리의 미술관에 아버지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수십 점에 달하는 사라졌던 대가의 추상화가 갑자기 등장하자 화단은 연일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작고한 화가의 작품은 가격이 없는 법이었다. 

나와 누이동생은 심사숙고를 거듭했다. 

우리의 결론은 이렇게 내려졌다.      


“아버지의 작품 중 화방에 있던 개별 작품은 파리의 아트 경매장에서...

동생이 간직하고 있던 세뱃그림 병풍은 우리 집안의 가보로...”     


파리의 아트 경매장에서 특별이벤트로 진행된 경매는 글로벌퍼포먼스였다. 

점이 선으로, 선이 입체로 구상된 아버지의 그림은 경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경매장에서는 물론, 전화와 인터넷으로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의 아시아 국가, 피카소의 나라 스페인, 고호의 네덜란드등 전 세계에서 경매에 참여했다. 작품에 대한 열기는  증폭이 증폭을 불러 뜨겁게 가열되었고, 경매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나의 멘탈리티는 폭발하다 급기야 붕괴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아버지에 대한 외경심과 죄책감이 온몸을 사로잡아 정신 잃은 사람처럼 아버지의 그림만 십자가를 우러르듯 바라볼 뿐이었다. 

저런 아버지의 작품을 가지고 한 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다니...     

누런 소가 코뚜레에 꿰어 있던 그림. 아버지는 나를 꿰뚫어 보시고 계셨다. 청개구리와 올챙이...

내 생각이 틀렸다. 아버지가 그리신 소는 누이동생이었다. 틀림없었다. 동생은 경매수입의 반을 나에게 주었다.     

“아버지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했는데....오빠에게 주는 세뱃그림을 얼마나 정성껏 그리셨어...오빠가 우리 집 기둥이잖아...”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저 평범하게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나는 아버지와 누이동생 덕분에 일약 부자가 되었다.

나는 교외에 제법 규모가 있는 아담하고 전원이 보이는 주택을 지었다. 일평생 온 가족이 함께 얼굴을 마주보며 살 수 있는 집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이식받을 골수를 못 구한 것은 형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백혈구를 만들어 내는 골수는 형제들의 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투병할 때 처음 알았다.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유전적 체질은 형제를 당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든 유전자에 더 가깝기가 형제 말고 누가 있겠는가. 

어머니도 3년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를 다 잃고 난 후의 친척 없는 서러움. 

설 날의 외로움. 

외로운 형제는 삶도 죽음도 외롭다는 것에 뼈가 사무치는 듯했다.

나는 고집스럽게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다.      


10.     


해마다 설날이 되면, 우리 가족들은 모두 모인다. 

아들 딸, 앞으로 생길 사위 며느리 손주들... 누이동생 가족들...

그리고 다 같이 세배를 나눈다. 

다 같이 모여있는 자손들을 굽어다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벌리지 않아도 입이 벌어졌다.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세뱃글을 써주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면 세뱃그림을 그려 주었겠지만, 그런 재주가 없으니 글을 봉투에 넣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봉투 속에 세뱃돈도 잊지 않고 넣어주었다.      


설 날 아침이다. 새벽부터 창문을 두드리며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상서로운 눈이다. 점점이 쌓이는....

이제 곧, 어깨에 쌓인 흰 눈을 털며 아이들이 들이닥치겠지. 

색깔 고운 한복으로 단장해 입고 복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서 달려 올 손주들. 

시집간 누이동생 가족들... 아들 딸들.  

모두들 고운 눈을 하고 공손히 세배를 하겠지. 

나는 세뱃글 봉투를 다시 한번 만져 보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소원 성취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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