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월된 둘째가
얼마 전부터 입을 떼기 시작했다.
'마, 마, 마.'
맨날 '빠, 빠, 빠'만 해대던
아이의 엄마 타령에 나는 그만 신이 났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시작한 재택 덕에
그 '마'가 그 '마'가 아니란 게 들통나버린 것.
어린이집 등원 하려 현관에 선 아이가
'마'를 외치기 시작했다.
앞에 선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옆에 걸린 마스크를 향해.
바야흐로 코로나의 시대였다.
맘카페는 엄마여론의 진앙지다.
그 곳에 올라오는 글에 스민 감정은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이된다.
요며칠 엄마들은 특히 우울했다.
한참동안 오른손 엄지를 튕기다가 생각했다.
이대론 안되겠다.
무기력하게 침잠하는 느낌이었다.
우울에 스크류처럼 빨려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정선희 씨가 우울을 떨치려 적었던 3줄 일기마냥
이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좋은 점을 찾고 싶었다.
폰을 끄고 노트를 열었다.
세상에. 생각보다 코로나의 순기능이 많았다.
적어도 9가지는 됐다.
1. 손꼽아 기다려지는 순간들이 생겼다.
자기 전 눈을 감고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 번 쯤 환승해서 도착한 이집트에서
모래 바람을 뚫고 피라미드를 구경하기도 했고
친구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풀빌라를 빌려
애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어제는 캠핑장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이렇게 뭔가가 기다려지는 게 참 오랜 만이다.
언젠가부터 여행도, 맛집도 일상이 되었다.
흔해진 탓에 더 이상 꿈꿀 이유없이
심드렁해졌던 것도 같다.
그런 내게 매일 밤 자기 전
꿈꾸는 순간들이 생겼다는 것은
소녀처럼 설레는 일이다.
2. 부모님과의 시간이 유한함을 알았다.
몇살을 먹든 자식은 아기다.
몇살을 먹든 부모는 언덕이다.
돌아보면 거기 있을 거라 믿는 그 언덕.
코로나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 노인이고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의 부모님들이
그 노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은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부모님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뵐 때면 손을 더 빡빡 씻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몇 년을
더 무디게 살았을지 모른다.
3. 가족과 부대끼는 시간이 늘었다.
재택을 하고 집콕을 하며
아이들과의 시간이 늘었다.
몸이 고되다. 짜증도 늘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 씩
아이들의 '최초'를 맞닥뜨린다.
처음으로 '마'를 했다
(비록 엄마가 아니라 마스크를 가리켰을지나)
처음으로 밀가루로 베이킹을 했고
(비록 사람이 먹을 맛은 아니었을지나)
처음으로 할아버지 생신 편지를 같이 썼다.
(비록 하라버지라고 썼다고 지적 받았을지나)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순간들을
아무도 기념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4. 이 나라가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견이 있을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난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라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단 걸 안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이 나라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나라가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코로나란 위기가 없었다면
회복될 수 없었을 믿음이다.
5.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며 잠들어 있던
취향을 발견했다.
꽤 오래 취향을 잊고 살았다.
육아와 출퇴근을 반복하며
'엄마'과 '직장인'의 정체성에만
익숙해져버렸다.
재택을 하며 고독한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쓰며
서재에 먼지 쌓인 채 위치한
소시적 나의 취향을 들춰봤다.
<먼나라 이웃나라>, <유리가면>
내가 역사와 여행, 연극,
만화에 갖고 있던 지극한 사랑은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더 오래 덮여 있을 뻔 했다.
6. 100 중 1의 긍정에서 삶의 태도를 배웠다.
다 같이 맞닥뜨린 코로나인데
이를 대하는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맘카페는 그 종합시장이었다.
어떤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글을 올렸다.
ㅠㅠㅠㅠㅠㅠ
어떤 이는 이들의 글에 댓글을 남겼다.
!!!! :)
ㅠㅠㅠㅠㅠㅠ를 쓴 이에게 휩쓸리다가
!!!! :)로 토닥이는 이의 댓글에
따뜻하게 자극받곤 했다.
그런 엄마가, 그런 사람이
되어보이겠노라는 다짐은
코로나가 내게 남긴 선물 중 하나다.
7. 모두에겐 이유가 있단 걸 알았다.
누군갈 미워하고 흘겨보기 딱 좋은 시대다.
누군가는 턱스크를 했고
누군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잡담을 나눴다.
그리고 나는 동료와 이들을 험담했다.
그러다 어느 주말인가 외출을 했는데,
마침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타지 않아
턱에 마스크를 걸치고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이웃이 탔다.
그녀는 내 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흘겼다.
나처럼.
모두를 지키기 위해 규칙은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흘겨본 누군가에게도
분명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흘겨보고 미워하기 전에
아주 약간의 여유를 두고 싶다.
저 사람도 지금 최선을 다해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중이라고.
잠시 긴장의 끈을 놓쳤을 뿐이라고.
그런 여유가 분노로부터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백신이 아닐까.
8. 동네맛집 덕에 미각이 확장됐다.
나라에서 할인해준 덕에 제로페이를 잔뜩 샀다.
큰 가게는 안되는 탓에 이사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동네 가게들을 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모르던 많은 가게들을 알았다.
스타벅스 라떼보다 맛있는
그 옆 라떼 가게를 찾았다.
이마트보다 저렴한 과일 가게도 알았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몰라서 못갔을
그런 곳들을 알았다.
9.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위기 속에 많은 이들의 헌신을 본다.
정은경 본부장님처럼.
이들의 헌신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듯
위로와 힘이 되는 존재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위로와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 분들의 헌신을 전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박세리 선수의 맨발을 보고 자란 여인들이
지금 세계를 재패하고 있듯
정은경 본부장의 흰머리를 보고 자란 이들이
또다른 위기의 극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까.
그때 그들은 이렇게 말할거다.
2020년 혹독한 코로나를 겪으며
헌신의 힘을 배웠다고.
그 시간 덕에 오늘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