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엄마만 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렇듯, 나도 항상 바쁘다.
‘그 완벽한 핑계'를 앞세워, 엄마에게는 보통 손주의 사진으로 안부를 전한다. 그날도 사진을 전달하고 일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보통은 아들이 바쁠까 봐 근무시간에 전화하지 않는 분인데 그날은 달랐다.
“우리 아들 바쁘지...” 전화기 너머로도 민망하다는 어머니의 표정이 전해졌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며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긴 공직생활을 은퇴하신 아버지는 새벽같이 농장에 나가 깜깜해야 돌아오시니, 엄마 혼자 집에 계시다 그냥 아들 생각이 났다고. 보내준 사진 속 손주가 얼마나 예쁜지 몇 번이고 다시 본다고. 그리고 “너 어릴 적 많이 닮았다.”는 말씀.
그러냐고, 난 잘 모르겠다고 웃으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분명히 들리는 음성. “아니야, 많이 닮았어. 아무도 모른다. 엄마만 안다.” 전화를 끊고 이상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그 말.
아무도 모른다? 엄마만 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소한 말이다.
엄마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다. 그리 부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아들만 잘 배우면 딸자식들은 자연히 덕을 본다는 시대였다. 그 시대의 믿음이 오늘날 어떤 배신을 했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숙제로 받아온 호구조사. 당시에는 학기마다 호구조사를 했고, 학생의 집에 세탁기, 냉장고, 피아노 등이 있는지까지 적도록 되어있었다. 선생님이 나눠준 설문지를 쫄랑쫄랑 가져가 내밀며 “최종학력에 뭐라고 써?”라고 물었을 때 흔들리던 엄마의 눈빛. 결국 중학교 졸업도 아니고, 중학교 중퇴라고 적어주신 그날. 엄마와 나는 각자의 이유로 창피했던 그날이, 어떻게 지금에 와서는 이토록 눈물 나게 아름다운 기억이 된 걸까.
기억하자면 끝이 없을 감상은 차치하고, 아무튼 내게 엄마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자신 있게 안다고, 그것도 자신만 안다고 하는 유일한 한 가지. 그게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한 것이라니.
1983년, 내가 태어난 해다. 그때만 해도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 맡겨 인화해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셀카니 인증샷이니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보통은 특별한 날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의 성장기가 담긴 앨범만 펼쳐봐도 알 수 있다. 백일, 돌, 소풍, 유원지... 일상이 아닌, 기념할 만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사진도 흔하지 않고, 지금처럼 '카톡'같은 손쉬운 전달매체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시절. 엄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했겠지. 남편은 출근하고, 친정 식구들과 친지들은 멀고, 지금은 흔한 사진 한 장을 어디 전하지도 못하고 오직 엄마만이 하루 종일 날 보고 있었겠구나. 어떻게 하면 웃는지, 우는지, 잠드는지...
사회의 기준에 못 미치는 학력을 가진 엄마, 예순이 훌쩍 넘도록 평생을 집에서만 보내온 우리 엄마. 지금껏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 생명의 시작에 대해, 유년에 대해, 성장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그리고,
엄마만 아는 그 소중한 존재가 오늘을 살고 있다. 내일도 살 것이다. 오직 엄마만 아는 그 존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