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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포 May 07. 2020

새로운 오늘을 시작(詩作) 해요

시처럼 아름답게 '시작'하는 삶

달이 차오르면 다시 기울듯, 자연의 운행처럼 삶도 언제나 일정한 형태는 아닌듯해요. 직선처럼 곧게 뻗어갈 줄 알았던 제 삶도 변화가 시작되었죠. 오래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게 되었어요. 표면적으론 몇 개월의 휴직이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죠.


십이 년간 착실한 직원이었어요. 신입 때는 몸으로 한번 더 때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험과 노하우도 쌓아가며 여러 번 승진도 해봤어요. 말하자면 좀 오글거리지만, 정말 제가 대표라는 마음으로 일했어요(그래도 이게 인정받는 직원 제1의 덕목이던 시절이 있었죠^^;;). 부족하지만 가진 능력 안에서는 열심을 다했어요.


그렇게 밤낮없이 바쁘게 다니던 직장을 놓아보니 삶에 여유가 생겼어요. 매일 유치원에 등교하는 다섯 살 난 우리 아들보다 제가 더 한가하니 뭐, 말 다했죠? 그래서 요즘처럼 봄바람 부는 햇살 좋은 날이면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서요. 얇은 겉옷 하나만 챙겼다면, 과감하게 반팔만 걸쳐도 나설 수 있는 완연한 봄이잖아요.



봄바람 가르며 쏘다니다 얼마 전 벚꽃 나무 하나를 사귀게 되었어요. 몇백 미터를 빼곡하게 채운 벚꽃길. 나무마다 초록의 어린잎들이 꽃잎을 밀어낸 지 오래인데, 유독 한 나무만 꽃이 만개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돋보여 예쁜 거 있죠. 너무 일찍 져버린 벚꽃이 아쉬웠는데, 그 나무 아래 가면 아직도 한창인 거예요. 그렇게 팔자에 없는 벚꽃구경을 며칠 더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나무는 늦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순리에 따라 자연스러운 시작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요.


그동안 제가 믿고 있던 세상의 시작이라는 기준을, 그 나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해요.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시작했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만의 순리에 따르는 거죠. 이미 파래진 주변 나무들도 어느 하나 늦게 시작한 그 나무를 문제 삼지 않아요. 오히려 "이야~ 너 드디어 시작했구나!"하고 응원하는 듯해요.


제가 그래 왔듯,
세상은 '시작'을 하나의 강력한 기준으로
매어두는 듯해요.

정해진 출발선, 목표, 심지어 시작에 대한 매뉴얼이 딱딱 정해져 있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리고 항상 누군가 그 시작을 지켜보고 관리하며, 때때로 우리 스스로가 엄격히 감독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기준에 맞추려면 저도 지금 당장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만 해요. 이력서를 작성하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며 구직활동을 벌이는 것이겠죠. 그렇게 되면 제 스스로를 점점 다그치기 시작할 거예요. 혹시라도 성과 없는 몇 개월을 보내기라도 하면 불안과 초초함에 온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가겠죠. 하지만 그게 정말 올바른 시작일까요.


누군가는 한창 시작해야 할 봄부터 그렇게 한가한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죠.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핑계를 좀 대자면, 늦은 시작이 올해 트렌드인 거 아세요?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19의 여파로 세계 곳곳에서 제때 시작되지 못한 일들이 수없이 많죠. 학생들로 북적이기 시작해야 할 학교는 잠들어 있고, 꽃들은 아무리 활짝 피어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 봄의 시작을 전하지 못하고 꽃망울만 동동거리고 있어요.


뉴스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늦어진 한 해의 시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오잖아요. 저도 그런 우려 섞인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사실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시작은 하고 싶지 않아요. 늦게 꽃 피운 벚나무처럼 주변의 시선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좀 더 여유롭게 머무르며 제 마음이 시키는 순리에 따라 시작하고 싶어 져요.


심지어 요즘에는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라는 시작의 정의를 제 삶에서나마 조금 바꿔 해석해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해봐요. 음은 같지만 의미는 조금 다른 '시작詩作(시를 씀)'은 어떨까 하고요.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드는 새로운 의미로 참 알맞은 시작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숙제처럼 주어진 긴장하고 두려운 하루가 아닌 간결하고 아름다운 하루로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삶 자체가 행복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삶을 새롭게 시작(詩作)하려고 해요.

그리고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열어가고 계신 분들께 저와 같은 시작을 해보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어요. 단단한 기준을 갖춘 세상 앞에 저 하나보단 둘이, 그렇게 여럿이 함께한다면 우리에게 정말 아름다운, 새로운 삶의 시작이 열리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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