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말고 하루에 단 한 가지만
오늘처럼 하늘의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던 날이었던가. 몇 시간째 내리는 비로도 얼룩진 하늘은 깔끔하게 씻기지 않았다. 오늘처럼 비가 내렸던 그날,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했다. "식사하셨어요"라는 무난한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래, 하고 좀 피곤한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느껴져 "오늘 뭐하셨어요"라는 색다른 안부를 더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하루가 정말 바빴다고 말씀하셨다.
자식들 다 키워 내보내고 별다른 일이 없을 텐데 바쁘다고 하시니 괜히 궁금해져 좀 더 캐물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진짜 바빴다. 오전에는 은행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시장에 가서 장도 봤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세상에, 오전의 시간을 모두 써버린 어머니의 은행 방문은 인터넷 뱅킹으로 10분 안에 처리될 일이다. 장보기 역시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이면 끝날 일이다. 그런 일들을 하루 안에 모두 해낸 것이 너무도 피곤하다는 말씀이셨다. 힘드시겠어요, 쉬세요. 하고 전화를 끊은 뒤 헛웃음이 나왔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하며 나를 설득하려 해도 이건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바쁜 직장생활에 지쳐있던 나는 속으로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들었다. 어머니가 바쁘게 보내셨다는 그 하루라는 휴일이 내게 주어진다면 정말 알차게 사용될 텐데 하는 서운함마저 들었다.
그런데 오늘 흐린 하늘을 보다가 문득 그날의 통화가 떠올랐다. 몇 년 전 헛웃음 쳤던 어머니의 바쁜 하루를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일을 하루에 처리했던 그날 어머니의 피로감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직장인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1위
'피곤해'
회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1위가 '피곤해'라는 조사 결과를 본 기억이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회사의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피곤해'를 연발했었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달만, 아니 하루만 쉴 수 있다면' 하고 기도 아닌 기도를 수없이 반복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맘껏 읽지 못했던 책, 운동, 여행 등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가며 알차게 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그런 기회가 주어졌는데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뜻밖의 휴일들이 시작되었음에도 계획한 일들을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만들었던 일일 시간표 수준의 꼼꼼한 계획이 일상에서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계획했던 일들이 대부분 휴식이나 놀이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조조영화 한 편, 쇼핑몰에서 점심식사 후 커피숍에서 독서, 근처 공원의 산책 및 러닝 후 저녁식사와 같은 정말 하루 일과라고 하기에는 식은 죽 먹기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의 하루하루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만 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가까운 사람들은 "너는 그동안 너무 일만 해서 노는 법을 모르는 거야"라는 위로를 건넸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공감했던 지인들의 위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틀렸다.
첫째, 노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너무 많아서다. 휴일을 맞이하면 장황한 목록 속의 하고 싶은 일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1순위라고 싸우기 시작한다. 각자의 주장마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 결국은 뭘 먼저 할까, 뭐가 더 알찬 휴일을 의미 있게 보낼 일인지 고민만 하다가 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TV를 보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둘째,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막상 휴일을 맞이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맛보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이게 어떻게 주어진 휴일인데, 이렇게 보낼 순 없지!'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뭔가 대단한, 최고의 만족을 찾다가 결국 소소한 만족 하나 건지지 못하는 허탈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하루에 단 한 가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 소소한 일 단 하나라도 마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는 몇 주째 나의 결제를 기다리는 목록이 쌓여있다. 10분이면 끝날 것 같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기에 오히려 하지 않게 된다. 언제나 더 중요한 일, 더 대단한 일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열한 일과도 아니고 휴일을 보내는 것에 더 중요하고 더 대단한 것이 있을까. 오히려 중요하고 대단하지 않은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것을 하는 날이 휴일이지 않을까.
아무리 바쁜 일상을 보내더라도 누구에게나 휴일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주말, 공휴일 그리고 뜻밖의 휴일. 이렇게 주어진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장황한 할 일 목록과 우선순위도 따지지 말고 단 한 가지를 선택해 바로 실행하는 것. 정말 사소하고 하찮은 그것 하나를 하는 것만이 뜻밖에 주어진 휴일을 완벽하게 보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