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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포 Apr 10. 2021

살살해

내가 다닌 초등학교 교정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병설유치원이 나온다. 그 맞은편에 오래된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여름쯤 되면 방과 후 친구들과 곧장 살구나무 아래로 몰려가곤 했다. 동그랗고 노랗게 익어가다 절정에 이르면 붉은 색을 띄는 먹음직스런 살구를 맛보려고. 하지만 매번 잘 익은 살구가 달린 가지는 손에 닿지 않았다. 그래도 따보겠다고 돌이며 나뭇가지들을 허공에 열심히 던지다 애꿎은 친구 머리에 맞혀 “야, 살살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결국 높은 가지에 달린 살구는 못 따고, 주변에 떨어져 깨진 살구 몇 알을 주워 맛보던 그 시절.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가장 노랗고 붉은 것으로 따먹어야지 하며 돌아섰던 기억들. 입안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시큼했던 그 맛도.


이른 새벽 운전대를 잡으며 시작되는 출근의 피로감과 성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그러다 제2경인고속도로를 지나는 차 안에서 바라본 하늘에 그 시절 맛보지 못했던 노랗고 붉게 익어가는 살구 하나가 달려있다. 일출이다.


우연히 바라본 일출 덕에 잠시나마 불안을 떨치고 유년을 추억했다. 그러다 문득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잘 익은 살구 같은 태양이 손에 닿을 만큼 큰 사람이 되었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답은 뻔하다. 아니오.

예나 지금이나 닿지 않는다. 여전히 땅에 떨어진 빛 중에 그나마 환한 것들 몇 개를 주워가며 살아가는 듯하다. 입에 댈 수도 없을 만큼 처절하게 으깨진 절망의 빛, 어떤 날은 그나마 먹을 만한 희망의 빛들을 주워들어 맛보며. 그 중에 제일 먹을 만 한 행복의 빛을 골라서 사랑스런 울애기 입에 넣어 줘야지 생각 하면서.


나름 열심히 해왔는데 어쩜 이렇게 바뀐 게 없나, 하는 생각에 다시 서운해지는 출근길이다. 캄캄한 새벽에 출발해 80키로미터를 달려 누구보다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고, 일과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업의 성과와 미래를 걱정하다 마무리하는 삶. 그런 하루를 다시 또 시작해가며.



살구 한 알 따겠다고 허공에 나뭇가지며 돌이며 집어 던지던 그때처럼 나름의 열심에 열심을 다해 지내온 시간들. 오늘따라 그동안 던졌던 ‘열심’중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똑 하고 떨어진 기분이다. “아얏” 하고 고개 들어보니 누구 원망할 친구도 없다. 그게 다 내가 던진 것들이라서. 그래도 분풀이는 해야 하니, 던졌던 나 자신에게 한소리 해본다.


야, 살살해!

비록 땅에 떨어졌어도 시큼한 살구 맛은 보면서 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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