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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Nov 19. 2023

경계와 관계

구남콜렉티브, 장도 입주작가전




여수에는 장도라는 섬이 있다.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진섬다리는 잠기기도 하고, 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느 저녁 산책 겸 걷다가 장도에 가는 다리를 마주쳤다. 오늘은 다리가 잠기지 않는 날이었다.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다리를 지나 장도에 들어갔다. 작은 섬 장도의 길은 마을길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살아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하얗고 단정한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옥 벽에는 신기하게도 그림자인 듯하면서도, 작품인 것 같기도 한 어떠한 모양들이 아른아른 비치고 있었다. 그 가옥들은 작가들이 입주해서 작업하는 창작스튜디오였다. 육지와 섬의 경계, 현실과 정신세계의 경계에 있는 장도에서는 어떠한 작업들이 이루어졌을까.  

장도의 입주작가들의 작업을 감상하러 전시에 갔다. 눈에 띄는 건 여러 비디오 영상이었다. 노래와 시각적 영상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은 이 작품들. '경계'라는 핵심 주제로 작업하는 구남콜렉티브의 작품이었다. 구혜영과 김영남 작가로 구성된 그들은 영상, 퍼포먼스,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나와 너, 인간과 자연, 행위자(작가)와 피행위자(관람객) 등 우리 사회(환경) 다양한 관계들의 사이와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처음 눈에 띄었던 것은, <해변에서>라는 회화 작품이었다. 위와 아래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세계 어떤 해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장면을 통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표현했다. 바다와 하늘, 사람은 어우러져있는 걸까? 아니면 멀리서는 어우러져있는 듯하나 가까이 보면 결국 어우러질 수 없는 경계를 이루고 있는 걸까? 때론 원근법이 무시되어 있기도 하고, 표정은 편안하기도, 뒤틀려있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애매한 관계, 그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은 <Acting Practice>, 세 개의 영상 작품에서는 각각 연극 대본, 영화 대본, 그리고 직접 만든 대본을 통해 연기연습을 하는 배우들의 영상이 담겨있다. 실제를 재현한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작품)을 바라보는 실제의 관람객인 우리. 실제의 재현을 바라보는 실제. 실제에서 겪은 일을 대본으로 쓴 행위 자체도 실제, 이를 연습하는 과정도 실제일 텐데, 이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도 실제, 감상하는 관객도 실제. 그러나 실제의 관객인 나에게는 <Acting Practice>라는 작품은 실제의 재현이고, 작품을 만드는 작가에게는 찍고 있는 비디오가 실제였을 테고, 이 연기연습을 하는 배우에게는 연습이 실제였을 테며, 대본을 쓴 작가에게는 어떤 경험한 실제를 재현하는 과정이 실제였을 테고. 결국 첫 아이디어라는 실제도 존재한다. 실제와 재현의 경계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옆은 <신기루>라는 단편영화로, 면접을 보는 여자 주인공의 신기루와 같은 꿈을 통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작은 엘리베이터 공간 안에서 무력한 여자, 혹은 피면접 대상을 면접 대상인 남자가 덮치려고 한다. 이를 발견한 또 다른 피면접 대상인 여자가 달려들어 도와주는 꿈. 그러나 이 영화는 분노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스릴러나, 사회비판적 영화이기보다는 코믹이다.


잠시 꾼 꿈에서 깨어나 '삶이 무엇인 것 같은가'라고 묻는 남자 면접관의 말에 여자 주인공은 대답한다. "신기루요. 항상 닿을 것 같은 곳에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잡히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는 되는 일 하나 없는 내 삶에 울지 않고 웃으면서 살려고요." 그리고는 코믹한 춤을 추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주인공의 말처럼 어쩌면 꿈이라는 것은 잡히지 않을 신기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과 꿈은 이루어질 듯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꿈은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것일지도. 또 주인공이 꾼 꿈과 현실 또한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의 꿈으로 시작된 이 작품을 관객인 나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은 채 바라보며 분노하고 또 웃었다.

마지막 작품은 세 개의 뮤직비디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첫 단추>라는 인생의 시작을 의미하는 뮤직비디오로 시작해 인생의 과정을 의미하는 <인생 글씨>, 그리고 망자에게 불러주는 노래인 망가와 함께 상여에 함께 보내는 꼭두 인형을 상징한 작품인 <꼭두>.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어우러지며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의 과정이 자연과 필연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인생 각 단계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인생의 시작, 과정과 끝은 물론 세 가지로 나누기에 모호하다. 그냥 어쩌다 시작되어 글씨를 써나가듯 삶의 서사를 만들어나가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경계들이 넘쳐난다. 인종, 종교, 국가, 성, 나이 등 나와 너를 가르는 수많은 기준들은 경계가 아닌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모호한 기준을 정하지 않더라도 통합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구남콜렉티브의 여러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 현실과 재현, 삶과 꿈, 인생의 과정의 경계가 결국 모호한 '경계' 그 자체가 아닌 '관계'로 바라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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