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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Nov 19. 2023

수행성의 미학



호기심을 따라 듣게 된 강의에서 계속해서 고정관념을 깨는 경험을 한다. 수행성의 미학, ‘신뢰’를 나타내는 아브라모비치의 위험천만한 작품으로 표지를 장식한 이 책. 조금만 방심해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가슴이 철렁해지는 사진이다. 작가는 이 작품뿐 아니라, 다른 극단적인 작품들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특히나 관객이 마음껏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위험하고 도발적으로 보이는 몇몇 현대예술은 어떤 것이 ‘아름답기’에 예술이나 미학으로 불리는 것일까?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을까?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수행됨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작품은 과연 어떠한 기능을 할까?



제주에서 예술 퍼포먼스를 하며 지내는 아트크루 살거스가 생각이 났다. 그들은 아트세닉이라는 작은 공연장을 중점으로 다양한 퍼포먼스, 거리 예술을 하며 지내는 프랑스, 일본 등 다국적 크루다. 예술을 직업으로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함부로 비평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특히나 삶 전체를 예술에 내던져 지내는 것이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작업은 이색적이면서도 강한 인상을 준다. 그들의 예술 퍼포먼스에는 자신의 육체적 희생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온몸을 내던져 감정을 표현한다. 불쇼를 하고, 페인트를 온몸에 뿌린다.


불을 이용한 파이어극 중 <론리 차일드>라는 작품은 프랑스 아티스트에게 직접 그 시작과 의미를 들었다. 버려지고 학대받은 아이로 시작하는 이 연극. 그는 어릴 적 직접 겪은 감정을, 겪어보지 않은 관객들이 느낄 수 있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불과 표정과 몸짓을 이용해 내지르는 소리 없는 고함은 마음에 송곳처럼 박힌다. 또, 어둠에 둘러싸인 아이와 반대되는 빛 속의 다른 아이의 등장.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음을, 빛과 어둠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가 아닌 결국 양과 음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세계임을 느끼게 해주는 연극이었다.


여전히 어둠 속에 태어나 아파할 어떤 아이들이 생각났다. 또는 어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밝은 면을 보고 싶을 것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세상의, 마음의 어두운 부분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임을. 나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세계임을.




책의 표지에 실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과 관련된 영상을 1년 전쯤 접했었다. 육체를 희생해 관객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건드리는 이 작가를 어떻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식을 잃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공연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 일단 공연에 들어서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진행하는, 자신을 베고 태우는 극단적 수행들. 그 수행들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그 내면을 시험한다. 과연 신뢰나 선과 같은 개념들이 얼마나 발현되고 있는지. 불완전함을, 내면의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된다. 어쩌면 관객에 따라, 그날의 일회적 상황 매개에 따라 의미가 역동적으로 창발 되는 수행으로서의 미학은 삶이다. 삶이, 인간이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것이고, 매 순간 고유하게 만들어지는 사건들을 닮았다. 그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은 각 개인 주체들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사랑한다. 그러나 개념의 틀을 깨고, 모든 것에 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와 기능이 있음을 이해하게 하는 작품들은 아름다움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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