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계획한대로 살아지지 않아
올해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은 퇴직이라고 생각했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때로는 학생이나 학부모들과의 관계가 나빠져서 포기하듯 퇴직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는 운 좋게도 평탄하게 교직 생활을 했고, 언제나 아이들이 예뻤다. 특히 마지막 맡았던 아이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그 어느 해 보다 관계가 좋아 매일 매일이 보람있고 행복했다. 이렇게 사랑스런 아이들과 내 교직 30년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마무리, 멋진 퇴장, 참 좋았다. 아쉬울 것도 미련도 없이 내 긴 교직을 마무리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어학연수를 떠나는 것이었다. 2개월은 어학원에서 기숙생활을 하며 영어공부와 현지 생활을 누렸다. 주말이면 혼자서 팔라완, 보라카이, 보홀, 반타얀, 시아르가오 등 필리핀 작은 섬들을 여행했다. 고즈넉한 혼자만의 여유있는 여행이 나를 충만하게 했다. 한 달은 숙소를 렌트해서 개인 튜터를 구해 영어공부를 지속하며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를 했다. 김치 대신 파파야 피클을 만들어 먹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싸고 손맛 좋은 맛사지를 즐겼다. 개인 튜터들과 함께 현지인들이 다니는 이터리(간이식당)에서 반찬을 사다가 햇반만 데워 먹기도 하며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도 했다. 마음 속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귀국을 해서는 부족하지만 써먹을 만한 영어를 장착하고 산티아고 순례길 전구 간 걷기를 시작으로 세계로 돌아다니는 달콤한 여행을 꿈꾸었다.
그러나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인생이지 않던가. 귀국한 지 며칠 만에 친정엄마가 허리를 다치셨다. 연세 있는 분들에게 흔한 압박골절로 3개월 간 꼼짝없이 간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들 직장 생활을 하니 현재 백수인 내가 맡았다. 간병인 생활, 그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엄마를 돌보는 것 말고도 엄마가 해 오신 살림살이를 함께 해 가면서 라꾸라꾸 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보낸 3개월 기간 동안, 골프엘보가 왔고 손가락 마디마디 통증이 왔다. 그러나 기간이 정해진 간병이었고 완전히 회복하신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기뻤다. 동시에 나는 엄마 곁에서 지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 맘대로 살아갈 생각이었던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약해져 가는 엄마를 돌보아 드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수없이 계산기를 두들겨야 했고, 결국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기간 동안 더 많이 얼굴을 보여드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렀다. 결국 나는 서울집을 전세로 내놓고 엄마랑 같은 아파트 같은 동으로 이사를 했다.
“니가 엄마 밥을 제일 못 얻어 먹었어.”
회복하신 후 엄마는 일상을 회복하셨고, 무엇보다 요리에 진심인 엄마는 더 열심을 내신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놓으시고는 얼른 내려와 밥 먹으라고 성화시다. 고기를 먹지 않는 나를 위해 김치만 넣어 만든 만두를 따끈따끈하게 찌신다. 늙은 호박을 긁어 달큰하게 호박죽을 쑤신다. 콩가루를 넣어 반죽을 하고 직접 밀어 만든 콩칼국수가 불면 맛이 없다며 빨리 내려와 먹으라고 부르신다. 다른 형제들은 곁에 가까이 살고 있으니 아무 때고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고 지냈는데, 서울살이 하는 나는 늘 엄마가 못 먹여 아쉬웠다니 당분간은 엄마의 먹자세례를 군말 없이 받고 열심히 먹을 생각이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아마 퇴직이 아니라, 엄마 곁으로 귀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별일 없으면 매일매일 엄마랑 함께 점심을 먹고, 엄마랑 유튜브로 베트남 시골 마을 영상을 본다. 날 잡아 함께 베트남 여행을 가자며 즐거운 계획을 세운다. 엄마 아프실 때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는 지금의 내 귀향이 순탄하게,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 사이사이 나는 또 나만의 여행을 갈 것이고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노는 나만의 일상을 꾸려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