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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Sep 17. 2020

#11 내가_왕이_될_상인가?(feat_계유정난) ③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⑪

#11 내가_왕이_될_상인가?(feat_계유정난)  


마침내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감행했다.

수양대군의 첫 번째 제거 목표는 당연히 김종서였다. 대호(大虎)를 잡지 않고서는 나머지를 사냥할 수 없었다. 대호는 당시 김종서의 별명이었다. 비록 71살의 늙은 대호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백두산 호랑이였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는 날의 장면은 큰 맥락은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아무래도 한쪽은 갑작스럽게 몰락했고, 다른 한쪽은 살육의 대가로 권력을 틀어쥐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인 자는 자기 입맛대로 말을 만들어냈던 게 역사가 보여준 교훈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수양대군이 늦은 밤 김종서의 집을 혼자 찾아갔다. 물론 수하들은 어둠 속에 숨겨둔 채였다. 난데없는 수양대군의 방문에 김종서는 의심스러웠지만, 혼자 온 것을 알고 수양대군을 맞아들였다. 의례적인 안부를 물은 뒤 수양대군이 김종서에게 종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영화 「관상」에서는 수양대군이 “갓끈이 끊어져 얻으러 왔다”고 했다). 김종서가 글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숨어 있던 수하가 달려 나와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쳤다. 그렇게 백호는 쓰러졌다. 김종서의 두 아들도 그날 함께 죽임을 당했다. 


가장 중요한 정적을 제거한 수양대군 일파는 미리 세워둔 계략대로 나머지 대신들을 차례차례 죽였다. 

그날 밤 죽고 사는 건 모두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달려 있었다. 왕명이라고 속여 대신들을 입궐하게 한 뒤, 살생부에 따라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에게 쿠데타 사실을 통보한 뒤, 스스로 영의정과 이조판서와 병조판사를 겸하며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리고 쿠데타의 마무리 수순을 향해 착착 나아갔다.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김종서와 결탁해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로 유배한 뒤 사사했다. 그리고 2년 뒤, 우의정 한확 등을 앞세워 기어이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냈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왕좌를 차지함으로써 쿠데타는 마무리되었다. 


혹자는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았다고 해서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혹은 수양대군이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거나, 그래서 단종이 왕을 하는 것보다 조선의 역사에서는 더 득이 되었다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단종은 숙부에 의해 죽임을 당해서 왕으로서 제대로 능력을 보여줄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니다. 무력으로 형식만 갖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이며, 아무리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했더라도 그 결과만 좋으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정난이든 혁명이든, 기존의 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왕위를 차지하는 방법에는 대개 두 가지가 있다. 

하나가 선위(혹은 선양)이고, 다른 하나가 방벌(放伐)이다. 선위는 군주가 스스로 다른 사람(대체로 더 덕이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이고, 방벌은 민심의 추대를 받은 사람이 실정한 군주를 폭력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제후국들이 명멸했던 중국에서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개념이었다. 중요한 것은 선위는 옳고 방벌은 잘못되었다와 같이 일률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는 선위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방벌의 방식으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민심을 잃은 군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더욱 포악한 정치를 한다면, 누군가 덕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 방벌의 방식으로 왕조를 교체해야 한다. 이는 역사에서 정당한 역성혁명으로 평가받았다. 은 탕왕과 주 무왕은 모두 폭군인 하 걸왕과 은 주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바로 방벌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선위를 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위는 군주가 ‘더 덕이 있는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권좌를 물려주어야 한다. 혹은 민심을 잃은 군주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면 이는 선위라 할 수 있다. 다시 계유정난으로 돌아가 보자. 단종이 민심을 잃었는가? 스스로 그 잘못을 인정했는가? 더구나 수양대군은 단종보다 더 덕이 있는 사람인가? 그러니 선위라는 형식을 취했다고 해서 쿠데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화 「관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수양대군이 조선 최고의 관상가에게 묻는 말이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왕조시대에는 이 자체만으로도 역모죄로 처벌될 수 있는 섬뜩한 질문이었다. 수양대군은 조카를 죽여서라도 물불 안 가리고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      


김종서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수양대군은 1452년 9월 10일에 고명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말렸었다. 하지만 김종서나 그 측근들은 엄청난 야욕을 가진 정적을 앞에 두고도 ‘만약’이라는 단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대사에는 늘 그 징조가 먼저 오기 마련이다. 당시 북경까지 왕복하는 데는 대략 6개월 정도 걸렸다. 그러니 만약 김종서 측에서 그 징조를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없는 사이에 그 수족을 잘라낼 수도 있었고, 먼 길을 다녀오느라 지친 수양대군을 중간 어디쯤에서 제거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수양대군은 원행에 풍토병이 겹쳐 빌빌거리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징조에 둔감한 것인지 일부러 무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종서 일파는 허허벌판에서 소나기 맞듯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수양대군의 허허실실 전략은 성공을 거뒀다. 

다른 것도 아닌 단종 즉위 임명장에 대한 보답으로 가는 사은사에 선뜻 나섬으로써 정적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명나라에 신숙주와 동행함으로써 주로 무인이나 무뢰배, 책사만 있는 자신의 진영에 학식 높은 집현전 출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계유정난의 해가 밝았다. 그해 4월에 수양대군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칼끝은 사육신을 거쳐 단종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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