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⑫
하늘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날 하늘에는 햇무리가 졌다. 어쩌면 비가 왔을지도 모른다. 사육신이 비명횡사한 지도 벌써 일 년 이상 지난 6월 21일이었다. 그날 세조는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을 모반 혐의로 투옥하였다. 종친과 백관 들은 세조에게 “상왕(단종)도 (전년도의) 복위 운동 모의에 참여하였고”, “종사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를 핑계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다.
실록에 따르면, 단종의 유배를 전후로 혜성이 유난히 많이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낮에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나타나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단종이 유배를 떠난 다음날인 22일과 24일에도 혜성이 나타나더니, 25일에는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고, 밤에 또 혜성이 나타났다. 태백성은 대개 저녁 무렵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그래서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면 태양과 맞선다고 하여 안 좋은 징조로 여겼다. 그럴 때마다 조선의 신하들은 “임금이 부덕한 탓”이라며, 모든 잘못을 왕에게 돌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 하나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하늘만이 홀로 세조의 부덕을 탓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월은 공교롭게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날에 매형인 정종(경혜공주의 남편)이 유배된 곳이었다. 풀로 엮은 허름한 집에 사방은 가시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10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정인지, 신숙주 등 대신들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죽이라고 계속 세조를 압박했다. 말이 압박이지 세조에게 명분을 쥐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여기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도 가세했다. 특히 계유정난 때 세조 편에 붙어 안평대군을 죽이라고 했던 양녕대군은 이때에도 연거푸 세 번이나 세조와 대면한 자리에서 단종과 금성대군을 죽이라고 청했다. 세조가 머뭇거리자 상소까지 쓰면서 앞장섰다. 개인적으로 양녕대군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줄 만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어쩌면 양녕대군은 오래전에 폐세자가 된 것을 늙은 다음에 뒤늦게야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정상적인 왕위 승계의 피해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때부터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전혀 다른 경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일종의 복수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인간사에 그런 경우가 많다 보니 설득력은 박해도 묘하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로 향했다.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이 사사되고 장인인 송현수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단종이 스스로 목매어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다 청령포와 마주한 언덕에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의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그날 시녀와 시종도 모두 동강에 몸을 던져 죽고, 단종의 시신은 그냥 방치되었다.
17살의 짧은 생이었다. 일설에는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다고도 전한다. 설령 그런 엄벌이 아니더라도 혹여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월의 향리인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자신의 선산으로 옮겨, 마침 노루 한 마리가 있는 양지 바른 곳에 묻었다. 영월 지역의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엄홍도는 단종을 장사지내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숙종 때에 와서야 단종은 복위되었다.
이때 사육신도 함께 복권되었다. 그러면서 ‘숙주나물’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젊은 날 성삼문과 절친이었던 신숙주는 성삼문의 행적과 대비되어 욕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