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⑭
문종은 그렇게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구리 동구릉에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여색을 밝히진 않았지만, 한 나라의 왕세자이다 보니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할 책무가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세 번의 혼례를 치렀다. 모두 왕세자 시절에 세자빈을 맞이하기 위한 혼례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 중에서 처복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팔자였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만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세 명의 부인은 모두 평탄한 팔자가 아니었다.
첫 번째 부인은 4살 연상의 휘빈 김씨였다. 왕세자의 배필이니 세종은 당연히 명문가의 딸을 간택하여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키는 컸지만 외모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무리 여색을 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일 터이고, 한창 사춘기 호르몬이 왕성하던 14살 소년의 눈에 박색의 여인이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첫날밤 이후 문종은 부인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녀는 시녀인 호초를 닦달해서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채근했다. 호초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가져다가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든 다음 술에 타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그 여자는 배척을 받는다고 하니, (왕세자가) 총애하는 두 시녀의 신발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몇 번 시도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그녀의 계속된 채근에 호초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몸에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그녀가 왕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압승술(壓勝術)을 쓴다는 소문이 세종과 소헌왕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이 그녀를 불러 친히 물으니 모두 자복하였다. 장차 왕비가 되어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모든 백성의 어머니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세자빈의 행태를 확인한 세종은 크게 한탄하며, 그녀를 폐서인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관직에서 파면시켰다.
약 3개월 후,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를 맞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거울로 삼는 법이다. 첫째며느리가 외모가 부족했다고 판단한 세종은 이번에는 외모가 뒷받침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아가씨를 짝지어줬다. 그리고 세 명의 여인(권씨, 홍씨, 정씨)을 왕세자의 후궁으로 들여 승휘(세자궁에 딸린 내명부의 종4품 품계)로 삼았다. 그러나 둘째며느리 또한 왕세자의 맘을 사로잡진 못했다. 그녀의 품성에 대해 실록은 ‘시기와 질투가 심하며’, ‘술을 즐겨 항상 방에 술을 준비해 놓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 자주 취할 뿐 아니라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 마셨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이 직접 여사(女師)로 하여금 『열녀전(烈女傳)』을 가르치게 했는데, 그녀는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라고 기록했다. 이런 기록이 전하는 걸 보면, 차분히 공부만 하던 젊은 문종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은 성격인 듯했다. 그러나 실패를 두 번 반복할 수 없었던 세종은 왕세자에게 “비록 여러 승휘가 있지마는, 어찌 정적(正嫡, 본처)에게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귀할 수가 있겠느냐. 정적을 물리쳐 멀리할 수는 없느니라”며 왕세자를 다독였고, 이에 왕세자도 세자빈의 처소에 간간이 들렀다.
그런데 급기야 현대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날 세자빈이 “태기가 있다” 하여,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혹시 태교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녀를 중궁으로 옮겨 조용히 거처하도록 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어느 날 그녀가 “낙태를 했다”며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했다. 급히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했으나,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거짓 임신은 그렇게 들통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간에 일어났던 그녀의 행실이 모두 터져 나왔다. 승휘 권씨가 임신했을 때 분개하고 원망하며 궁인에게 했던 말들과 왕세자가 종학(宗學, 조선 시대 왕족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세종이 1428년에 설치하였으나 연산군 때 없앴다가 다시 중종 때 잠시 부활되었다 없어졌다)으로 옮겨 거처할 때, 그녀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던 일도 있었다.
그중에 제일 압권은 이것이다.
휘빈 김씨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던 그녀는 결국 궁궐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궁궐 여종인 소쌍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성애로 발전한 것이다. 궁인들 사이에 “세자빈이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당연히 왕세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느 날 왕세자가 청소 중이던 소쌍에게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물으니, 소쌍이 깜짝 놀라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소쌍에 대한 세자빈의 집착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빈은 소쌍과 함께 동침한 후로는 시중드는 여종 대신 자신이 직접 이불과 베개를 정리했으며, 소쌍이 잠시라도 자기 곁을 떠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면서 다그쳤다. 당시 소쌍은 승휘 권씨의 사비(私婢)인 단지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했는데, 세자빈은 자신의 사비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해 소쌍이 단지와 놀지 못하게 했다.
결국 소문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함께 먼저 소쌍을 불러 물으니, 소쌍은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결국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도 폐서인되어 쫓겨났다.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사례로 두 번이나 세자빈을 쫓아내다시피 했으면 큰 충격이 왔을 법도 한데, 세종은 서둘러 세 번째 혼인을 추진했다. 대신들이 한시라도 빨리 배필을 정해야 한다고 주청했을 때는 그해의 흉년을 핑계로 두어 번 손사래를 쳤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두 번의 실패는 정작 당사지인 왕세자에게도 알게 모르게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세간의 흔한 말처럼 사람도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 왕세자가 이미 23살의 성인이니 후사까지 생각하면 더는 늦출 수 없었다. 세자빈의 자리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알아보았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잘 모르는 인물을 들이느니 이미 여러모로 검증을 거친 기존의 후궁 중에서 뽑기로 했다. 조선 궁중에서는 첩을 정실로 삼은 사례가 없는 일이라 세종도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중국의 사례에 비추어 추진할 수 있었다. 이는 진즉에 대신들도 추천했던 방식이었다. 최종적으로 승휘에서 양원(세자궁에 딸린 내명부의 종3품 품계)으로 승진했던 권씨와 승휘 홍씨가 최종 후보자가 되었다. 세상사가 그렇듯 심사위원들 간에 쌈박하게 의견일치가 되진 않았다. 세자는 홍씨를 더 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권씨에게 더 많은 가점을 주었다. 권씨는 이미 딸을 출산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왕조시대 궁궐의 여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더구나 나이도 조금 많고 관직도 더 높았다. 아들을 낳거나 부부가 화목하게 사는 것 등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건 둘 다 동일한 조건이니, 이런저런 의리상 권씨를 세자빈으로 들여야 한다고 세종은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순빈 봉씨를 폐서인시킨 지 약 두 달이 지나고 세 번째 세자빈이 결정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빈이 된 양원 김씨(현덕왕후)는 5년 후 세종의 바람대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단종이었다. 세자가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자 세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에 대한 대사면령을 실시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교지 읽기를 채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큰 초)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불길한 징조는 다음날 바로 현실로 다가왔다.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세자빈이 죽자 문종은 왕위에 올라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더 이상 혼인을 하지 않았다.
문종은 조선 역사상 재위 기간 중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단종의 모후가 일찍 죽고 문종이 어린 단종의 후견인이 되어줄 만한 새 왕비를 들이지 않은 것이 수양대군 왕위 찬탈의 한 빌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런가. 살아서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미의 원혼은 쉽게 이승을 떠나지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어린 조카와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 꿈에 가장 자주 나타난 이가 바로 현덕왕후였다. 그녀는 세조에게 “니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니 아들을 죽이겠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20살 한창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현덕왕후의 원혼에 시달리다가 죽었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인 소릉(昭陵)을 파헤쳐 관을 꺼내 강물에 던졌다. 또한 세조는 만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이것도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뱉은 침이 묻은 자리가 썩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다. 특히 의경세자가 단종과 같은 해에 죽었지만, 단종보다 오히려 한 달여 먼저 죽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의경세자는 1457년 9월 2일에 죽었으며, 단종은 같은 해 10월 21일에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물론 지금도 단종이 ‘자살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엄마가 세자빈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딸은 단종의 유일한 누나이자, 드라마 「공주의 남자」로도 방영되었던 경혜공주다. 그녀는 남편인 정종의 유배길을 따라 수원으로 갔다가 단종 복위 사건이 터지자 다시 전라도 광주까지 따라 내려갔다. 세조의 특별 지시로 유배된 왕족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어 광주의 유배지에는 목책이 설치되고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가두었으며, 식량은 열흘에 한 번씩만 공급하고 우물도 집 안에 파놓고서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막았다.
일국의 공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이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그나마 나았다.
남편은 1461년 역모 사건에 휘말려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그녀는 순천부의 관노가 되었다. 다행히 며칠 뒤 사면을 받았지만 이미 모든 걸 잃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었다. 그녀의 사면 뒤에는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노력이 있었다. 당시 경혜공주에게는 아들 하나와 서울에 올라와서 낳은 딸이 있었는데, 두 아이를 정희왕후에게 맡기고 그녀는 절에 들어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녀의 아들은 예종에 의해서 비로소 역적의 후예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