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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Nov 20. 2020

#15 생육신을_위한_변명 (마지막 편)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⑮

#15 생육신을_위한_변명     


남효온은 「육신전」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익히 알려진 대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와 함께 생육신 중 한 명이다. 

생육신은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생육신을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던 동시대에 벼슬했던 사람으로 생각한다. 즉 당시에 사육신과 궁궐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세조가 왕위 찬탈한 이후에도 조정에 ‘살아남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은 자의 배신’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덧씌우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생육신 중 나이가 많은 이맹전과 원호는 세종 때 벼슬을 했다. 하지만 이들도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모두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맹전은 계유정난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와 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거하였다. 친한 친구마저 만나길 거절하고 30여 년이나 문밖에 나오지 않은 채 90여 살에 죽었다. 원효 또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향리인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생육신 중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인 김시습은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한양의 모든 사람이 세조의 권력에 벌벌 떨고 있을 때 거열형을 당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의 한강가에 임시로 매장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생육신 중 가장 후배이자 「육신전」을 지음으로써 지금의 사육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남효온은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죽기 1년 전인 1455년에 태어났다. 생육신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이들을 마치 세조 정권에 부역한 사람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비굴하게 세조에게 목숨을 구걸한 사람쯤으로 생각한다. 이는 신숙주나 정인지, 최항 등의 이야기와 아무 의심 없이 버무려진 결과일 것이다. 


생육신은 모두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죽은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계기는 공교롭게도 최초로 성공한 반정인 중종반정이다. 이후 사림파가 대거 등장하면서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들 생육신의 절의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시호를 내려주는 등 크게 추앙하였다. 당시에 이들처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 여섯 명만이 생육신이라는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세상사가 그렇고, 사육신 또한 그랬듯이, 이들이 생육신이 된 건 이들에게 그만한 이유와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략하나마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모두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 한 줄의 기록이라도 이들의 삶에 대한 상상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여기에 적어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김시습은 생육신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워낙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살에 이미 신동으로서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 세종은 도승지를 통해 김시습이 똑똑하다고 하니 한번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승정원에서 김시습을 궁궐로 데려와 시험을 보았다. 5살이 쓴 한시를 보고 깜짝 놀라 세종에게 보고하자, 세종이 김시습에게 상으로 비단 50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별명은 ‘5세 동자’가 되었다. 나중에 김시습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절간에 의탁하고선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선조의 어명을 받고 지은 『김시습전』에는 “노산군(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김시습은 마침 삼각산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으며, “젊어서는 유생이었고, 중간에 승려가 되었고, 만년에는 머리를 길러 유가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에는 다시 두타(頭陀)의 형상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가 공부했다던 삼각산 속 절은 중흥사로 알려져 있다. 이이는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며 김시습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이는 김시습에 대해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 규정했다. 글자 그대로는 “선비의 마음에 스님의 발자취”란 의미로, 유교가 사상의 본령이고 승려 생활은 살아가는 방편이었다는 뜻이다. 김시습은 일생의 절반 정도를 설잠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살았기 때문이다. 


젊은 날 한때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한 이이의 품평이라 더욱 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른 뒤 19살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을 승려로 살다가 환속했다. 조선시대 천재를 일컬을 때면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이다. 그런 둘이 모두 한때 머리를 깎고 불가에 귀의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이이와 김시습은 둘 다 외가가 강원도 강릉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이가 “절의군자”라고 칭했던 것과 달리, 이황은 김시습을 ‘색은행괴(索隱行怪, 은밀한 것을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 세상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이상한 말을 하고 세인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로 규정하며 “떠돌이 광인”이라 했다. 김시습을 바라보는 유자의 평가는 그만큼 차이가 컸던 셈이다.


김시습의 초상화를 보면 수염은 있었으나 관과 옷은 승려 행색을 하고 목에는 염주를 둘렀다. 

김시습은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렸는데, 심경호 고려대 교수는 “그의 자화상이 우리 미술사에 남아있는 자화상 1호”라고 했다. 당시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은 공신이 되는 길뿐이었다. 시대가 변해도 상을 주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에 상장을 주듯 당시에는 공신이 되면 공신녹권(공신을 책봉하고 공훈을 적어 수훈자에게 준 문서)을 주었고, 상금을 주듯이 땅을 사패하였고, 부상으로 승용차를 주듯이 잘생긴 말을 한 필 주었고, 수여식이 끝난 후 단체 사진을 찍듯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는 보통 2개를 그려, 하나는 국가에서 소장하고 하나는 당사자에게 주었다. 


공신 중에는 초상화 그리는 걸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성공신에 선정된 류성룡은 초상화를 거부했다. 류성룡이 고향인 안동에 머무른 채 서울에 올라오지 않자 선조가 예우 차원에서 화공을 직접 보내 그리도록 배려했다. 류성룡은 이 화공을 그냥 돌려보냈다. 이렇듯 공신이 되면 자신의 초상화를 공식적으로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 공신되기가 그리 쉬운가. 그렇다 보니 역사 속 인물 중에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린 사람도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일 것이다. 윤두서보다 한참 앞 세대인 김시습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렸다.


김시습은 21살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들었다. 

3일간 통곡하고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자신의 표현대로 전국 각지를 ‘탕유(宕遊)’하였다. ‘탕유’란 ‘방탕한 유랑’이란 의미로, 김시습은 관서 지방을 여행한 후 『유관서록』을 엮고 『탕유관서록후지』를 지었다.

그리고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이 영의정이고 김수온이 공조판서로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살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으며,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주의 거의 모든 유적을 시로 읊었다.

47살이던 1481년(성종 12)에는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고 새로이 아내로 맞아들이는 등 환속하는 듯했으나, 이듬해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충남 부여의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하여 유골을 수습해 부도에 안치하였다. 


김시습은 평소에 세조 정권에 복무한 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김시습이 한양 거리에서 정창손을 만나자, “너 같은 놈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안 된다”고 소리치기도 하고, “너 아직도 살아 있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정창손이 쭈뼛거리며 물러났다고 한다. 또한 선조 때 윤근수가 쓴 『월정만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시습이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종로구 교동)에서 묵었다. 서거정이 찾아가면 벌렁 드러누워서 발장난을 하면서 얘기하였다. 이웃 하인들이 모두 ‘김 아무개가 서 정승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부터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찾아왔다.”     


또 다른 생육신인 이맹전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계유정난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낙향했다. 앞서 말했듯 죽을 때까지 소경과 귀머거리라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고 단종이 죽은 영월을 향해 면벽하며 지냈다.

조선 중기에 살았던 최현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 “갑술년(1454) 즈음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 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었다. 

어떤 후생(後生)이 “선생께서 초야에 묻히신 백 년 동안에 집안의 사면 벽만 남을 것이니, 자손의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됩니다”고 하니, 이맹전은 “가난으로 가업을 전하면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종직은 그에 대해 “표리에 하자가 없고 사물과 경쟁하지 않았다. 중년에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망장촌으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는데, 나이 90세에 이르렀다. 부인 김씨도 무병하였다”고 했다. 그의 무덤엔 아무 글도 새기지 않은 조그만 비석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조여는 계유정난 당시 태학의 학생이었다. 

단종이 쫓겨나자 함께 공부하던 유생들과 작별하고 함안으로 돌아가 은둔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일생 동안 물고기 낚시나 하면서 생을 마쳤다. 조여는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곳인 영월의 자규루(子規樓)에서 함께 모이자는 글을 동지들에게 썼다고 하나, 실제 모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묘표에는 ‘선생의 마음은 뒷사람이 선을 그어 헤아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만일 서산(西山)의 두 아들이 당시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서로 심곡을 털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했을 것이다’고 적혀 있었다. 서산은 수양산의 다른 이름이니, 그를 백이숙제에 비유한 것이다. 숙종 때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함안에 사당을 세워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하였다.     

   

원호는 집현전 직제학이던 단종 초년에 은퇴하여 원주에 살았다. 

단종이 승하하자 가족과 함께 영월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삼년상을 지냈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의리와 절개를 기려 숙종은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했다.

정승을 지낸 최석정은 원호의 묘갈명에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적었다.      


성담수는 아버지 성희가 성삼문 사건에 연좌되었기에 평생 벼슬을 버리고 세상과 단절한 채 영월을 그리워하면서 보냈다. 그에 대해 선조 때 학자 우계 성혼은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한양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며”, “파주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성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효온은 앞서 언급했듯이 생육신 중 가장 후학이며 「육신전」을 지음으로써 오늘날 사육신의 이름을 전한 인물이다. 그 또한 다른 생육신과 마찬가지로 비분강개한 맘을 간직하며 살다가 삶을 마쳤다.   

    

         

* 이 글을 마지막으로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한 글자라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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