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하나씩 꺼내봐요.
얼리어답터 에디터 기획 회의 시간. 다양한 안건이 오가고 꽤 오랜 시간 깊은 토론을 하게 되는 시간이에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분이 보다 재미있게 읽으실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 또 고민하죠. 그렇게 고민 끝에 얼리어답터 에디터들의 최애 애플 제품을 소개해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하지만 앱등이인 제게 좋지 않은 제품이 어딨겠어요. 오히려 다 가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더 클 뿐인걸요. 그래서 '최애'라기보다는 제 첫 애플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속 아이템을 소개해드릴까 해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장소든 함께하는 모든 것에는 그때의 추억이, 감정이, 의미가 깃들기 마련이잖아요. 여기에 ‘처음’이라는 것이 더해지면 더 오래오래 기억되고 애틋한 감정마저 들죠. 그런 존재가 제게는 아이팟 비디오라고 불리던 ‘아이팟 클래식 5세대’예요.
2005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회사에서 월급이라는 것을 받기 시작한 때였어요. 받아서 쓰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기분은 꽤 짜릿했죠. 정말 어른이 된 느낌이랄까. 열심히 발로 뛴 만큼, 힘들게 땀 흘린 만큼 더 보람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인생은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저이기에 조금씩 돈을 모아 열심히 일한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나씩 해보자 마음먹었고, 약 5개월 후 산 첫 선물이 바로 아이팟이었어요. 지금처럼 애플제품이 대중화되어 있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순간 시선과 마음을 뺏겨버렸죠.
지금 보아도 촌스러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한 아이팟 클래식 5세대의 외모는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을 거예요.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크기, 시크한 블랙 컬러에 깔끔한 이목구비,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메탈의 뒤태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죠. 비록 먼지만 스쳐도 상처가 날 정도로 예민하다는 사실은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소중히 아끼고 귀히 여기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때부터 늘 애플 제품을 구매할 때는 으레 보호필름과 케이스를 같이 준비하기 시작했고요.
하드 내장형 플레이어이기에 전원을 켜면 화면에 사과 마크가 나타나며 위잉 위이잉~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그땐 그 소리가 거슬렸었는데, 지금 다시금 손에 올려 두고 들어보니 그렇게 반갑고 정겨울 수가 없네요.
그뿐인가요? 60GB라는 넉넉한 공간으로 담아낸 수만 곡의 음악을 손가락 하나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누비는 그 경험은 얼마나 신선하고 근사하던지요. 은근히 중독성도 강하고 제 자신이 더 멋있어지는 것 같아서 남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상황이 되면 괜스레 손위에 올려 두고 곡을 선택하듯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를 반복하곤 했어요. 스르르르륵, 스르르르륵. 빛보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스크롤하는 재미. 한 번 빠지면 절대 헤어나오지 못하죠. 심지어 이 터치 휠로 브릭게임이나 솔리테어 게임까지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지 않나요?
아이팟 비디오라는 이름답게 최대 480 x 480(MPEG-4) 해상도의 영상도 넣어두고 볼 수 있었는데요. 지금처럼 자막파일을 따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영상 포맷도 H.264나 MPEG-4만 인식하기에 매번 전용 파일로 변환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그것도 즐거웠어요. 해외 드라마를 변환하느라 밤을 새기도 하고,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겠다고 무료 강의 영상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그렇게 욕심이 앞서 잔뜩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두어도 항상 용량이 두둑히 남아있는 것을 보며, 애플이 마법을 부린 건 아닐까 신기하기도 했죠.
평범한 mp3플레이어이길 거부했던 아이팟은 그밖에 주소록이라던가 시계, 사진갤러리, 캘린더, 알림, 메모, 스톱워치 등의 기능도 다양하게 제공했습니다. 그야말로 만능 재주꾼이었는데요. 메모 기능의 경우 .txt 파일로 된 문서를 읽을 수 있었기에 이를 활용해 나만의 이북을 만드는 재미도 쏠쏠했었죠.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어요.
물론 인생이 그렇듯, 순탄한 일만 있었던 건 아녜요. 출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크기에 수명도 늘어나고 조명도 더 밝아진 80GB의 5.5세대가 등장해 마음을 쓰리게 했죠.
또 하루는, 책상 위에 올려둔 아이팟을 미처 보지 못한 친구가 깔고 앉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그 이후 아이팟 액정의 오른쪽 부분이 줄처럼 나가더니 점점 넓어졌어요. ㅠㅠ 워낙 애지중지했었기에 속상했죠. 수리라도 받아야겠다 알아봤는데, 아니! 그 당시 애플(코리아)의 A/S 정책이란…! 무상수리기간이 지난 제품은 무엇을 수리하던 그 제품 출시가의 절반이라는 거예요.
아이팟 클래식 5세대를 40만원 대에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액정 하나 교체 받는 비용이 20만원이 훌쩍 넘는다니! 그것도 이미 출시된 지 몇 년이 지난 상황이었던 터라 중고 시세도 10만원 대였는데 말이에요. 결국 아픈 속을 달래며 그 상처를 안고 가기로 했고, 더 열심히 잘 써야겠다 다짐했어요. 그 마음을 아는지 10년 넘게 그 상태로 잘도 버텨주고 있네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했던가요? 그렇게 아끼고 좋아하던 아이팟이었지만 점점 더 뛰어나고 더 멋진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그 아이를 찾는 시간이 줄어갔어요. 아이팟 5세대에서 아이팟 셔플 2세대로, 그리고 아이팟 나노 5세대로, 또 아이팟 터치 4세대로. 정말 다양한 기기들과 함께하게 됐죠. 그런데 조금 이상했어요. 분명 새로운 제품에 자꾸 눈이 가고, 매번 새로운 기기가 주는 설렘과 기분 좋은 느낌은 있었지만, 처음 아이팟을 손에 쥐었던 그 감동과 전율만큼은 아니었거든요. 마치 예전의 그 두근거림을 그리워하듯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운 제품들 사이를 방황해오기를 몇 년. 제 인생 속 mp3 플레이어는 아이팟 클래식 5세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았습니다.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하며 미치도록 가슴 뛰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그때 그 시절 아이팟. 그때부터 시작된 사과 농장은 아직도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내 방에서 십여 년 전 플레이리스트를 들려주는 그 아이만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네요.
* 5월 31일, 얼리어답터에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