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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Aug 16. 2023

결혼 후 장래 희망 찾기

아마… 4개 국어를… 할…걸요?



어떤 책을 읽다 문득 남편을 향한 미안함에 어깨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책의 중심 소재는 아니었지만, 책 속에서 몇몇 유럽 기혼 여성의 삶을 묘사한 부분이 있었는데, 아이가 있든 없든 모두 직업이 있는 상태였다. 순간 마음속으로 '어?' 하는 짧은 탄성이 터지며 '나, 괜찮은 걸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다음 달이면 영국인 남편과 결혼한 지 만 3년. 워낙 집안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남편이 단 한 번도 맞벌이를 요구하지 않아서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일거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결혼 전,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한국어 교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지만, 영국에서 그 커리어를 잇는 것보다 남편을 따라 고국을 떠난 결혼 이민자로서 영어를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건,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된 것이 슬프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요리와 베이킹을 하며 주부로 사는 삶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며 살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결혼 이후의 삶이 가장 평안하고 안정적인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남편과 내가 살고 있는 벨기에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 국가의 기혼 여성 중 나처럼 가정주부로만 사는 경우가 극히 적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며 푸스스 기가 죽었던 것 같다.




(잠들 채비를 마친 침대 위)

나 : 여보, 미안해.

남편 : 뭐가 미안해?

나 : 결혼한 후로 모든 경제적인 책임을 여보 혼자 감당해 왔잖아.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남편 : 그런 문제라면 내가 더 미안하고 고마운데?

나 : 어째서?

남편 : 결혼하면서 너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한테 와 줬잖아. 만약 우리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넌 훨씬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테고, 음식으로 인해 서러울 일이나 이방인으로 사는 어려움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았을 거잖아. 그러니 내가 더 미안하고 고맙지.




남편은 우리의 결혼으로 인해 본인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희생했다 여겼고, 평범한 유럽 여자들처럼 결혼 후에 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년, 영국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해 전기세가 폭등했었는데 그때도 남편은 내게 일절 경제적 보탬이 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 시부모님으로부터 '넌 일할 계획이 없니?'라는 질문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분들께서는 남편과 나를 독립된 가정으로 인정하고 참견하지 않는 편이라 더 이상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내 커리어의 부활(?)을 제안하는 말을 들은 터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새로운 꿈과 목표를 가져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서른의 중반에 접어든 만큼 내가 가진 최대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었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과 관련 경력이 있으니 여기서도 같은 일을 찾으면 조금 더 쉬울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분명 행복하기도 했지만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외국어를 배우고 구사하는 일이지, 외국어로써의 한국어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나와 잘 맞는 언어라는 걸 느껴 사이버한국외대에서 중국어학 학사를 받았고, 영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매일 영어 원어민과 대화하며 살고 있다. 남편의 벨기에 발령으로 6개월 전부터 브뤼셀에 정착해 프랑스어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난 여러 언어를 배워야 하는 삶을 타고난 운명이 아닐까, 싶다.


잘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세상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내가 이름을 떨치며 살지 못한다 해도, 시간만큼은 촘촘히 쓰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의도치 않게 중국어와 영어, (아주 기초적인) 프랑스어까지 하는 폴리글롯이 되었지만, '저 4개 국어 해요.'란 말은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지금의 흐릿한 자신감이, 차차 선명해질 수 있도록 꾸준한 시간을 촘촘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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