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켈러 자서전 -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2019년 3월 어느 봄날이었다. 겨울이 지나가니 햇빛도 따스해졌다. 유독 이번 3월의 봄 날씨는 더 따스했다. 회사 바로 옆 공원에는 자작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다. 러시아 유학시절 자작나무 숲을 돌아다니며 산책했던 추억이 떠올라 점심시간이면 공원을 자주 갔다. 이 공원을 정말 좋아했다. 유학시절 좋아하던 자작나무도 있었고 공원 벤치에는 큰 나무가 친구처럼 한 그루씩 붙어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다 보면 나무와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따뜻한 햇빛과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올 때면 슬며시 졸기도 했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에 제작했던 오디오북을 크게 켜놓고 종종 모니터링도 했다.
2월 말 제작 도서를 검수하고 있던 중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작 요청이 들어온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제작이 미뤄져 책장 맨 아래 있었다. 간절한 책 제목에 이끌리어 몸을 굽혀 책을 꺼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23살의 헬렌이 쓴 자서전과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53살에 기록한 수필이었다. 교과서나 위인전을 통해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23살의 헬렌은 어떻게 자서전을 기록할 생각을 했을까? 무엇보다 헬렌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절망과 같은 상황에서 헬렌은 무엇을 기록했을지 정말 궁금했다. 책의 첫 챕터를 펴자 헬렌의 어린 시절이 펼쳐졌다. 그녀에 삶에서 후회가 없는 듯했다. 시각과 청각을 잃었지만 설리번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고 누구보다 더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헬렌이 처음 '사랑'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배우는 장면이었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의 손바닥에 한 문장을 썼다. "나는 헬렌을 사랑해" 그러자 헬렌이 "사랑이 뭐예요?"라고 묻는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의미를 두고 헬렌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사랑은 꽃의 달콤함 인가요?"
"이것이 사랑인가요?"
"선생님, 사랑은 이런 건가요?"
설리번 선생님의 설명은 헬렌에게 추상적이었지만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혼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 사랑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헬렌의 나이는 고작 7살이었다.
나는 보통 책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살펴본다. 이 책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 파악하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이번 헬렌의 책 맨 앞장에는 역자후기가 있었다. 책을 번역했던 번역 작가님의 후기였다. "손으로 보고 손으로 들은 사람이 손으로 적은 글이기에 한 자 한 자 더욱 정성 들여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번 작품에 최선을 다한 번역작가님의 정성이 느껴졌다.
헬렌의 글을 읽으면 차가웠던 마음이 녹아지고 격동했던 마음이 자연스레 평안함을 찾는다. 나는 무엇보다 헬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시각, 청각 모두 가지고 있다. 헬렌이 보는 세상은 나와 너무도 다르다.
나는 점심시간이면 회사 바로 옆 공원 벤치에 종종 찾아갔다. 잠깐이지만 눈을 감고 봄바람을 맞으며 햇빛을 느껴봤다. 헬렌처럼 아름답고 섬세한 표현은 불가능했지만 따스함과 평안함이 나를 감쌌다. 무엇보다 눈을 감으니 주변 소리가 더욱 잘 들려왔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바람소리가 느껴졌다. 보고 있어도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었다.
이번 헬렌의 책은 아쉽지만 요약 형태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완독으로 헬렌의 모든 문장을 담아내고 싶었지만 제한적인 제작비에 어쩔 수 없었다. 가장 꼼꼼하고 똑 부러지는 작가님께 요약을 부탁했다. 열흘 남짓 지나 대본이 완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독 이번 헬렌 켈러의 요약 작업에 신경을 많이 더 많이 써주신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작가님과 1층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자서전과 에세이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헬렌처럼은 아니지만 나에게 유학시절 있었던 일들을 책으로 써보는 건 어떨지 아이디어도 주셨다.
낭독은 우리 회사 전속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성우님께 부탁했다. 따뜻한 음색으로 인위적이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성우님이었기에 헬렌의 이야기와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낭독 톤을 가진 성우님이었다.
녹음 중 중간중간 길지는 않지만 잠깐의 포즈를 자주 요청했다. 포즈를 통해 2~3초 되는 시간 동안 헬렌의 문장을 듣는 청취자들이 음미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헬렌의 표현들이 너무도 섬세하기에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단순히 낭독했다면 놓쳤을 문장들도 조금 천천히 낭독하니 더욱더 귀에 잘 들어오기도 하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녹음을 진행하면서 성우님과 다양한 헬렌의 표현에 대하여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녹음하면서 성우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오디오북을 편집할 때는 가벼운 배경음악을 선정하여 인트로, 아웃트로 정도로 삽입하여 시그널로 포인트를 준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다양한 자연의 효과음과 함께 사용하고 싶었다. 헬렌의 이야기가 좀 더 극적으로 느껴지길 원했다.
재래식 물 펌프를 통해 처음 '물'이라는 단어를 깨우치는 순간과 갑자기 찾아온 소나기 속에서 느꼈던 두려움, 바다를 처음 마주한 헬렌의 이야기를 보다 리얼하게 사운드로 구현하고 싶었다.
알맞은 효과음 찾는데 애를 먹었다. 우리 회사는 효과음 사전을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효과음 파일에는 각 번호가 붙어있어 필요한 효과음을 프로그램에 검색해 해당 번호를 찾아 사용하는 형태였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기에 효과음 검색은 전부 영어로 찾아야 했다. 수십만 게나 되는 효과음들 속에서 헬렌의 이야기에 들어갈 효과음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나하나 전부 재생하고 믹싱 작업을 통해 효과음을 만드니 생각보다 제작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도 헬렌의 이야기와 효과음이 조화되어 분위기 있는 음원이 연출되어 작업은 재미있었다.
보통 1, 3인칭 나레이션에 효과음을 잘못 입히면 되레 어색하다. 그렇기에 효과음 사용 범위에 대해 나는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 나레이션과 같은 지문에서는 효과음을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지문은 정확하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을 하는지와 관련된 행동이 나타나 있기에 중복해서 표현해줄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지문에 맞추어 효과음을 사용한다면 더더욱 어색하다. 예를 들어 "컵을 자리에 놨다."(툭)"그리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터벅터벅)과 같은 느낌이 연출된다.
그러나 지문이 없는 대화 형태, 독백 형태의 문장에서는 반드시 사용해준다. 효과음 하나로 장소, 시간, 분위기, 행동에 대한 정보를 전부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렌의 자서전은 1인칭 시점으로 쓰여있었다. 지문을 통해 정확하게 무엇이 보이는지, 어떤 소리나 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등 효과음 정보가 명확하게 표기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양한 앰비언스, 효과음, 음악을 사용했다. 최대한 헬렌의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 앰비언스와 음악 위주의 구성을 주로 사용했다.
오디오북이 완성된 3월 말 나는 파일을 핸드폰에 옮겨 담았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자작나무가 심긴 즐겨 찾는 공원 벤치로 갔다. 3월의 날씨는 더더욱 따스했다. 핸드폰 최대 음량을 맞추어 헬렌의 자서전을 모니터링했다. 사실 편집을 하며 벌써 3번 이상 전체 검수를 끝낸 상태였다. 그래도 이 자리에 나와 다시 듣고 싶었다. 오늘따라 시원하게 스치는 바람과 자연이 오늘따라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와 손으로 느껴지는 거친 벤치의 감촉 또한 새로웠다. 벤치 등받이 뒤로 머리를 젖히고 하늘을 보니 유독 파랗고 아름다웠다. 이런 소소한 기쁨을 선물해준 헬렌에게 감사의 마음 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