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단 입문 가이드
지자체에서 출연한 지역문화재단은 예술행정기관이다. 그렇다면 예술행정이란 무엇일까. 행정은 행정인데 앞에 예술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니, 무언가 예술활동처럼 자유롭고 창의적인 행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럴까.
작금의 문화재단은 예술행정기관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 광역과 기초 문화재단에 시행하고 있는 예술행정은 사실 예술을 빼도 무방할 만큼 공무원 행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공무원 행정보다 훨씬 경직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단이라는 공공 예술행정기관을 설립한 이유는 예술 생태계와 행정적 전문성을 모두 겸비한 전문가로 하여금 유연하고 창의적인 행정을 집행하기 위해서다.
법과 규정이 예술의 특수성을 세부적으로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행정가는 법과 규정의 틀 안에서 유연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집행하여야 한다. 예술의 비고정성, 비계량성 등 특수성(예술현장의 목소리)을 반영한 정책과 지침을 만들어내야 하고, 현장에 적용하고 지속 보완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행정도 기존 행정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 행정은 견제와 규제에 맞서지 않고 방어적으로 뒷걸음치는 나쁜 관습이 있다. 또, 행정가는 규정을 최대한 소극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습관이 있다. 1997년 경기문화재단은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방자치단체 공공 예술행정이 시작된 지 25년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예술행정은 기존의 공무원 행정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행정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걸까. 일반적으로 행정이라 하면, 법 규제 안에서 국가가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국가 작용을 말한다. 즉, 정부의 행정(공공행정)을 일컫는다. 좁게는 국가나 지자체 공무원의 활동 및 그 행정조직을 의미한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사이먼(H. A. Simon)은 '어떤 특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두 사람 이상이 모여 협동하는 행위'라고 정의했고, 왈도(D. Waldo)는 넓은 의미의 행정을 '고도의 합리성을 지닌 협동적 인간 노력의 한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종합해보면 행정이란 넓게는 인간사회의 모든 조직의 활동, 좁게는 법규범에 따라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공공행정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좁게는 행정이라 하면 우선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공무원 행정시스템을 말한다. 그로 인해 아직도 공무원 서열 및 공문서 용어 등에서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다. 아직도 공문서에 항상 등장하는 "만전을 기하다"는 표현 역시 일제의 잔재다. 공무원 행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문화재단은 지자체의 관리감독을 받기 때문에 관리감독기관인 지자체의 행정시스템을 준용하게 되고, 그 시스템이 수년간 지속되면 예술행정은 결국 공무원 행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또한 문화재단 설립 초기 지자체 공무원들이 파견 형태로 일정기간 머물면서 공무원 행정 시스템을 유산처럼 남기고 가는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뭐든 관성은 자체의 힘을 갖기 마련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 힘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변화와 혁신은 관성의 힘에 의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지만 예술행정에서 핵심은 행정이 아니라 예술이다. 예술(art)이란 흔히 미적 작품을 창작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라틴어 아르스(ars) '조립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6세에 와서 숙련된 특수한 기술에서 미적 의미의 개념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좁은 의미로 회화, 조각 등 시각예술(fine art)로 국한되어 사용되어 오다 현재는 순수예술을 종합적으로 일컫는 말로 확대되었다.
2012년 제정된 예술인 복지법에서는 예술인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예술인”이란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 (예술인복지법 제2조(정의))
그렇다면 예술과 행정이 결합된 예술행정은 무엇일까. 우선 예술 진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존의 행정 시스템을 보다 효율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술행정도 결국 행정에 일환이기 때문에 예술행정의 시작은 문화예술관련 법 규범이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진흥의 법률적 출발은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으로 볼 수 있다. 관련 법령에 근거하여 1973년 7월부터 공연장 및 사적지 입장류에 문화예술진흥기금이 부과되었고, 그 기금을 운용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개원하면서 본격적인 공공행정이 시작되었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2005)은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법으로 관련 법률을 근거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2005)년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광역지자체 문화재단에서 속해 운영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지정하여 꿈다락, 지역특성화로 대표되는 예술교육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기본법(2013)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규정하고, 문화인력과 진흥을 위한 조사연구와 개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한 법 규범으로 문화진흥을 위한 분야별 문화정책을 11개 항으로 구분해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설립되어 국가 문화정책연구의 핵심 기능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진흥법(1972)을 통해 전문예술법인단체를 지정 육성하고, 건축물 건축 시 1% 규모로 미술품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설치하여 예술진흥사업에 활용하였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의전당, 한국문화예술연합회 등의 해당 법률을 근거로 설립 운영되고 있다.
지역문화진흥법(2014)은 지역문화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여 그동안 민법 등의 근거로 설립 운영되었던 지역문화재단의 설립 근거를 법규범으로 명확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생활문화지원, 문화도시 지정, 지역문화전문인력양성 등의 사업을 확대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로 인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생활문화진흥원(2016)(현 지역문화진흥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밖에 문화재보호법(1962), 무형문화재 보존 및 진흥에 관한 법률(2016), 예술인복지법(2011),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2014), 국제문화교류진흥법(2017)에 이르기까지 문화, 예술, 박물관 및 미술관, 도서관, 대중문화예술, 문화다양성 등 20여 개의 법률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결코 행정이 예술을 앞지를 수 없다.
예술행정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우선 행정의 토대인 해당 법규범을 우선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하길 권한다. 모든 예술행정기관의 설립 및 운영, 정책의 방향은 모두 해당 법규범을 시작으로 줄기가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과 규범은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없다. 특히 예술을 지원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은 더더욱 해결할 수 없다. 법과 규정의 테두리 안에서 효율적으로 예술을 진흥하기 위한 행정적 절차를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예술행정가의 역할이다. 예술가가 행정의 도움으로 보다 수월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존 행정 규제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좋은 예술행정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의 수월성과 사회적 가치 등 특수성을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우선 관련법을 기본으로 한 행정시스템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행정 혁신도 결국 행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창의적으로 고민하고, 관성을 깨고 변화하려는 예술행정가가 많을수록 결코 행정이 예술을 앞지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