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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정은 지금뿐이야

3화_가능한 지금의 시간들을 많이 느끼고 새겨두고 싶어

남자 친구와는 말 그대로 죽이 잘 맞았다. 노래 취향부터 즐겨먹는 음식, 기분 좋아지는 주량, 유머코드까지 잘 맞아서 온종일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다 집에 가서 또 전화를 붙들고 2시간씩 통화를 할 정도로. 매일 같이 만나 대화를 나누니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금새 마음이 깊어졌다.


이 나이를 먹고 누군가를 이렇게 폭풍같이 설레는 맘으로 좋아할 수가 있구나,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서로의 모든 것을 빨리 알고 싶어하고 서로를 완전히 뒤덮어버리는 넘쳐흐르는 사랑이 그만큼 빨리 닳아 없어질까봐.


"혹시 너 막 잘 질리는 스타일이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때 그때 다른 거 같아."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마. 이렇게 잘해주다가 나중에 변하면 나 서운할 수도 있어."
"...."


잘해주지 말라는 내 말에 그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좋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는 거 같았지만 내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것을 막고 싶었다. 붕붕 떠다니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니까. 초기의 불타는 연애가 점점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상대의 열정이 식었다고 속상해하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역시 몇 번의 연애와 실패를 거듭해본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그 상황에서 "아냐!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나는 한결같이 이렇게 너를 사랑할거야!!!!"하는 식의 가슴 뻐근한 고백은 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점이 씁쓸할지언정 전혀 서운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잠들기 전 통화를 하는데 그가 말했다.

"00아, 나는 정말 니가 너무 좋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감정은 변하겠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의 이날들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 너무 좋아서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설레고 그런 시간들이. 그래서 가능한 지금 시간들을 많이 느끼고 깊이 새겨두고 싶어."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감정을 절제해야만 더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둥 나중에 변할 거면 처음부터 잘해주지 말라는 둥 괜히 어줍잖게 어른스러운 척을 한 내가 머쓱해졌다. 마치 사랑을 적금저축하듯 척척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이자라도 붙여서 써먹을 수 있다는 듯 굴었으니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중에 우리가 지금처럼 뜨겁고 설레지 않는 날이 와도 그때는 다른 느낌의 사랑이 있을 거야. 그건 또 그대로 정말 좋을거야."


연애 초기의 서로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설렘, 신열 같은 달뜸은 오직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감정이 지금과 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었을 때, 혹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때로 소홀해졌을 때, 지금의 특별했던 기억이 서로에 대한 첫마음을 되새겨주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감정을 억누른다고 우리의 감정을 엿가락처럼 더 길게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98도의 사랑도 21도의 사랑도 모두 사랑은 사랑이다. 그 온도는 달라져도 그 안에서 우리의 편안한 자세를 찾으면 될 일이다. 서로의 온도를 조금씩 맞춰가면서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라면 좋겠다. 마음껏 사랑해볼까 한다. 지금이 흘러 넘치는 사랑을 그대로 쏟아볼까 한다.   

Kyoto, 2016
지금 너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아.
나중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함께있기만
해도 좋은 나날이 와도
그건 그대로 또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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