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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가 Sep 08. 2020

키즈카페 대신 북악산으로

다른 동네로 '놀이터 원정'을 다녀야 할 만큼 이 동네는 애들 갈 곳이 없다.


애들이 아주 어릴 때야  별 상관없지만 좀 커서 '나가자'병에 걸렸을 때가 문제다. 조용히 산책이라도 갈 곳이 있어야 말이지. 굽이 굽이 언덕이 태반인 데다 평지는 차들 쌩쌩 다니는 대로변뿐이니...  


그렇게 힘든 동네 산책을 다녀오던 어느 날, 아파트 너머 숲이 눈에 들어왔다. 궁금증이 일어 지도를 찾아보니 거기는 바로 '백사실계곡'이란 곳으로 가는 입구였다.  


그리 멀지 않은 데다가 거의 언덕 수준의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추사 김정희 별장터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나는 곧장 길을 나섰다.


첫째가 혼자 걷고 둘째는 겨우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다닌 백사실계곡 가는 길. 북한산의 겨울바람이 유독 매섭던 어느날 애들을 완전무장시켜 산으로 올라갔다.
너무 옷을 껴입혀서 뒤뚱거리던 첫째가 그만 눈길에 미끄러져 구른다. 아프진 않고 재밌다며 두번 세번 굴러 내려가는 장난꾸러기. 둘째도 덩달아 따라하며 웃는 모습.

올라가다 보니 가깝고 정말 가깝고 놀거리 볼거리 가득한 핫플레이스가 나왔다.


그곳은 조선시대 서예가 김정희가 한때 별장으로 썼다는 별장터가 있다. 지금은 비록 주춧돌만 남았지만 연못, 정자터까지 그대로 남아 옛 모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아이들이 그곳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면 백 년도 넘는 시간과 이어져있는 느낌이 든다. 비 온 뒤 개구리 소리며 가을에 지천으로 떨어진 도토리, 밤.. 모든 것이 완벽한 놀이터이자 쉼터였다.

 

둘째가 조금 더 커서 더 자주 가게된 백사실계곡. 가는 길에 떨어진 꽃을 머리에 꽂아주었다.
같은 아파트 친구와 함께 지난 봄 백사실계곡에 갔을 때. 별장건물 터 한켠에서 부서진 붉은 벽돌을 빻으며 아이들은 요리를 시작했다.
꼼지락거리더니 뚝딱 한상 멋지게 차려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정형화된 플라스틱 장난감이 아닌 이런 놀이를 하게 해주고 싶다. 얼마나 재밌고 얼마나 멋진지 알려주고 싶다.

애들을 키우며 어찌나 자주 갔던지 이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추억이 쌓이고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아이들도 강해져서 조금 더 멀리 가기도 하고 내내 안고 걸어야 했던 길도 제 발로 성큼성큼 잘 간다. 그럴 땐 대견하다가도 커버린 시간들을 놓친 것만 같아 아쉬운 묘한 감정이 일었다.


늦가을 산책하고 돌아온 둘째의 주머니가 두둑해서 보니 낙엽이 한가득. 애 눈에도 가을은 집으로 가져오고 싶을만큼 예뻤나보다. 그 마음이 귀여워서 사진으로 남겨뒀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백사실 계곡의 연못터에 옹기종기. 비가 온 뒤라 개구리들이 어찌나 많던지. 개구리 하나만으로도 이야깃거리 웃음소리가 넘친다.

자연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나무나 꽃 이름을 척척 알려주는 엄마는 아니지만 그저 아이들이 숲에서 위안받는 환경을 주고 싶었다.


때론 힘들지만 느리고 불편한 이 동네가 그래서 좋다.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커서 스트레스받을 때면 술을 먹거나 의미 없이 긴 통화를 하거나 소비를 하며 뭔가를 풀지 않았으면 한다.


힘든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 이 숲이 생각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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