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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가 Dec 18. 2023

인생의 거창한 순간 따윈 없다

무라마키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나는(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생각하는데,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는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비이클이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써야 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신이 가진 것이 '경량급' 소재고 그 양이 한정적이라고 해도 조합 방식의 매직만 깨친다면 그야말로 얼마든지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진정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내갈 수 있습니다.




그림책작가가 되겠다고 면접보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가 밑에서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공부한 적이 있다. (물론 내 돈 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주제를 던져주면 거기에 내 인생을 더해 한편씩 써오는 식이었는데 매번 다른 사람들의 글을 감탄하며 읽었었다. 다들 문창과 출신이거나 독립출판사를 운영하거나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갔던 경력까지 있었다.


플러스, 어찌나 인생들이 스펙터클한지. 거기에 비하면 내 인생은 안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나름 고생도 해보고 바닥까지 가봤다 생각했는데 내가 말한 바닥은 지면 정도였고 남들이 말하는 바닥은 바닷속 마리아나 해구 깊이쯤 돼야 바닥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살시도, 부모님 이혼, 자퇴, 알코올중독 같은 단어들 이 나올 때마다 내 인생엔 더 '센 게' 없나 열심히 뒤적거렸으나 쓸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좌절스럽던지.


글을 쓰려면 벼랑 끝에 몰려야 되는데 나는 너무 평지에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니 글은 점점 더 산으로 가고 결국 '난 작가는 아닌가 보다'라는 결론만 갖고 나오게 됐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시간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하루키가 쓴 저 구절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거장이 그렇다는데!'


내가 글 쓰는 일을 오해해도 아주 단단히 오해한 것이었구나. 소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작은 일상의 소재라도 그것을 어떻게 엮느냐가 핵심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쏟아지는 여러 상황 속에서 제대로 못 보고 혼자 잘못된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수업을 원망했는데 선생님 죄송합니다 ㅠㅠ)


이제와 드는 생각인데 그땐 좌절감이 너무 커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 연락도 잘 안 받고 그랬던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 나이를 떠나 서로 글 이야기 하며 좋은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내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알겠다.


우리는 로또당첨을 기다리지만 대부분의 인생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고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별 것 아닌 작은 행복들이 모여 '나는 행복하다'는 굳건한 긍정을 만들어내듯 작은 일들을 무시하지 말고 글 쓸 때도 작은 소재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가장 작은 것이 모여 가장 큰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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