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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격하는지혜 Mar 02. 2024

Every good thing with a DREAM

LAUNCHING DEEPER #1

“Every good thing in this world started with a DREAM”

- Wonka (2023)


나는 꿈을 잘 꾼다.

어떤 꿈이냐면 현실과 맞닿아있는, 좀 의미심장한 내용의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꿈을 맹신하진 않는다. 그냥 후에 어떤 식으로든 확인이 되는 꿈에 대해서만 되새길 뿐.


첫 시작은 스무 살 때였다. 청년부 수련회를 갈지 말지, 고민이 컸던 시점이었다. 결정을 못 한 상태에서 성경을 펴놓고 잠이 들었나. 꿈에 예수님이 등장했다. 사탄으로 보이는 검은 존재와 함께.

가운데 나를 두고 일정 거리 떨어져 있는 구도였다. 서로 막 공격하다가 한쪽이 치명상 입거나 HP 같은 게 소진되면 지는 그런 게임처럼. 그리고 곧, 딱 그런 이미지로 사탄이 예수님을 향해 어떤 힘이 들어간 공격을 날렸는데 그 타격을 온전히 입는 건 나였다. 꿈에서도, 저 자식이 예수님을 상대로 할 순 없으니까 나를 공격하는구나 싶어 꽤 억울해했더랬다. 하지만 억울함도 잠시, 예수님이 사탄을 향해 두 팔을 쫙 펼쳤고 엄청나게 큰 장막 같은 형상의 공격이 이루어지며 나는 꿈에서 깼다. 마지막까지 보진 못했지만, 그 장막을 보는 순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나는 여느 기독교인의 일화들처럼 수련회에 참석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따로 있다. 젊디 젊은 막내 외삼촌이 어느 건설업체의 부실 공사로 비명횡사하여 장례를 치르고 나서 며칠 후일까.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잠깐 잠이 들었고 꿈에 삼촌이 나왔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자시의 영정사진을 들고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평소의 표정으로, 그러나 꽤 밝은 안색으로 잠시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환한 빛으로 가득한 곳, 혹은 그 빛의 출처가 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꿈이 깼고, 그간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삼촌은 천국에 갔을까. 에 관한 염려를 털었다.


그러고 나서도 의미심장한 꿈은 듬성듬성 이어졌다.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근황을 전하면, 시간이 꽤 흐른 후 우연한 기회에 꿈에서 전한 그 혹은 그녀의 근황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사실의 맞고 틀림과 상관없이 나는 왜 그 사람이, 하필 내 꿈에 나왔나, 매 순간 궁금했다. 관계가 끊어졌다거나 소원해졌다거나 해서, 직접 소식을 물어보는 게 어렵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꿈에서 전한 소식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내용의 것이기도 했다. 여전히 답은 모르겠으나 근래 드는 생각은, 대부분 과거의 어느 순간 꽤 오래 마음을 써서 생각했던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꿈속 등장인물로 출연했다는 사실로 당시의 애쓴 마음이 하나의 통로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영화 ‘문라이즈 킹덤’ 중


자,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본격적인 계기, 얼마 전에 꾼 꿈을 이야기할 차례다.

어떤 설교자가 계속 말씀을 전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말씀을 나누라는 압박을 받고 있어서, 재촉에 약한 나로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끙끙거리던 찰나, 성경 말씀 하나가 귓가에 들려왔고 꿈에서 깼다. 대충 ‘흥왕하게 하신지라’ 요 내용이 들어가 있었고 대충, 사도행전 어디엔가 있는 말씀이겠거니 생각했다. 솔직히 더 깊이 다루고 싶진 않았다. 이 꿈의 의미심장함이 확인되는 순간 뭔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구체적인 계획 하나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긴 했으니까, 단지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았을 뿐, 와, 하나님이 이걸 제대로 짚어냈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주 예배에서 이런 내용을 맞닥뜨렸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한 첫 번째 순종은 그저, 베드로의 소유이자 어부로서 그의 일상을 유지하는 통로였던 배를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 사용하도록 내어 주는 행위였을 뿐이란 것이다. 나의 배는, 내 글을 올리는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 정도야, 마음이 조금 수월해졌다.


문득 ‘흥왕하게 하신지라’란 말씀을 정확하게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디에 있는 구절인지, 어떤 내용에 딸려 있는지 제대로 찾아보아야겠다는. 그리고 말씀은 나의 예상을 벗어난 대목에서 발견되었다. 비슷한 문장은 사도행전을 포함하여 몇 군데 존재하긴 했으나 완전히 일치하는 곳은 출애굽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출애굽기 1장 20,21절


놀랍게도, 이 말씀은 현재 나의 업 중 하나, 나의 배 중 하나인 가방을 만들고 파는 일, 이를 담아내고 있는 브랜드 명칭을 정할 때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고민할 당시 출애굽기 첫머리에 등장하는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가 떠올라 부아에서 이름을 따왔었다. 은연중에 의식의 깊은 곳에서 계속 되풀이되던, 지속 가능한 일인가, 옳은 선택이었나, 하는 물음을 하나님이 듣고 있었고, 그에 관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답을 건네준 것이다. 그래, 너의 글도, 가방을 파는 일도 틀리지 않았고, 이제 말씀이 전해지는 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내어 주기만 하면 된단다.


왜 이런 의미심장한 꿈이 찾아올까. 나의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 의식이 힘을 잃는 공간인 까닭일까.

나의 의식은 너무도 힘이 세서,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자기 육체와 정신의 판단에 강한 신뢰를 가지고 그 너머의 통로로 찾아오는, 믿음의 작용이 필요한 내용이나 소리는 종종 언짢아하니까. 그래서 답답함에 나의 영혼이 꿈속에서 직접 찾아 나섰다가 옳거니, 하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건 아닐지.


뭐, 헛소리다.

꿈꾸는 자의 꿈 이야기는 타인에겐 헛소리일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그 꿈이 꿈꾼 자, 본인에게 더없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면, 영혼에 뭔가 찌르르한 감각이 어린다면 그 꿈은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다. 그 꿈만큼은, 신과 영혼의 맞닥뜨림이 일어난 시공간이 되어 그의 실재적 현실에 의미심장한 작용을 일으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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