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걸음 Apr 17. 2021

#14 우물 안 개구리의 탈주

기적, 한번 더 유럽

우물 안 개구리의 탈주


한번도 꿈꾸지 못한 곳에 서서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짚어본다.


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생을 끝까지 아름답게

걸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변종모作



영국을 다녀 온지 고작 3개월도 되지 않아 기적처럼 다시 유럽 밟았습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며 인터뷰로 만났던 스타트업 대표님이 제안하신 해외출장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종업계라 부를 법한 유사한 분야였기에, 여름에 찾아 뵌 후로 쭉 연락하며 도와드리던 사이였습니다. 그런 대표님께서 해외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자 가장 먼저 저희 팀에게 전화를 주신 터였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현실이 되어 서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 평 남짓하게 주어지는 전시 부스를 기획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벤처 투자자들과 미팅을 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일’을 하러 가는 자리였기에 팀원들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해외 가는 일이라면 일단 설레던 저에게는 행복한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수강하고 있던 과목들도 해외시장조사론이나 해외투자론 등 출장 취지와 딱 맞는 것들이었고, 국제통상이 전공인 덕분에 교수님들의 양해를 구하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겨우 한 계절만에 다시 향하게 된 유럽입니다.

불과 몇 달 전 처음으로 유럽을 간다고 세상 다 가진 듯 들뜨던 스물 두 살에게는, 겪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경험한 적 없던 세상이 조금씩 열리는 듯 했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세계가 가까워지고, 작게만 주어졌던 하늘이 넓어져가는 듯 했습니다. 어쩌면 더 큰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세상에 심장이 방망이질 쳤습니다.



11월의 북유럽은 차분했습니다. 베이지색과 회색으로 칠해진 모노톤 건물들은 잿빛 하늘과 어울렸고, 쌀쌀한 바람에 큰 키의 백인들은 옷에 목을 숨긴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무심한듯 시크한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산타클로스의 나라 답게 밤이되면 곳곳에 따뜻한 빛이 켜졌고, 집집마다 빨간색 크리스마스 장식이 마을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묘한 조화와 설렘이 있었고, 또 반전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차가운 도시 외곽에서는 세계 최대의 젊은 사업가들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을 따라 참여한 스타트업 전시회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클래시 오브 클랜 게임으로 유명한 핀란드의 스타트업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행사였습니다. 축구장 몇 개를 합친 것보다 큰 전시장에 어두운 조명과 형형색색 조명들로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트렌디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고, 부스도 네모격자에 딱딱한 흰색에 상투적인 모양이 아니라 각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한껏 살린 개성 넘치는 모양과 구성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이벤트 슬로건대로 그대로 젊고, 열정있고, 도전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가득 태우고 있었습니다. 대표들은 사업 설명을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벤처 투자자들은 매의 눈으로 아이템과 기업 건전성을 평가하며 투자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과 청년들, 참가자들이 제품에 대한 가감 없는 의견을 공유해 주었고, 때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먼저 제공해주기도 했습니다. 도전과 열정으로 꽉 찬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매일 일과는 펍을 들려야만 끝이 났습니다. 하루의 전시가 끝나면 한국에서 함께 날아온 스타트업 대표들과, 또 네트워킹을 하며 만났던 외국인들과 맥주잔을 부딪히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시대와 사업, 아이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취기와 함께 새벽을 맞고는 했습니다. 분명 3시에 해가 지던 11월의 핀란드였지만, 턱없이 짧고 부족하게 느껴지던 핀란드의 밤입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들로 인해 자꾸만 삶이 꿈틀대는 듯 했습니다.

사실 출국 전 날 펑펑 울었습니다. 해외 전시를 경험한다는 들 뜬 마음과 도와드린다는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준비과정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겨우 단 둘이 해외 전시부스를 기획하고 물품까지 단기간에 준비해야 하는 업무는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가혹한 일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투자 미팅 어레인지부터 브로셔 디자인, 부스 소품까지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챙겨야했기에, 분명 본업이 아니었지만 학업 및 병행하던 활동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습니다. 매일 같이 학교 앞 카페에서 다음 날 새벽까지 몇 리터의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시며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가장 속상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한들 처음 하는 일이었고, 병행하는 본업들로 진척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중간 리뷰 때마다 혹독한 피드백을 접해야 했고, 출국 전날에도 강한 질책이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소중한 시간과 투자한 노력의 댓가가 겨우 비참함과 초라함인것 같은 상황에 속상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물에 자괴감이 몰려와 괴롭혔습니다.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서 최선을 다했지만, 능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느낌이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이 서러웠습니다.

핀란드에서도 몰아치는 일정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부스 운영 전후로 항상 미팅 준비를 해야 했고, 중간중간 들어오는 신규 투자자 상담도 진행 해야 했습니다. 행사 틈틈이 한국과 시간이 맞을 때면 학교 팀원들과 온라인으로 전공 과제를 했고, 촉박한 일정에 끼니 거르기 일쑤였습니다.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로비에서 대표님과 하루 일과 정리도 해야만 했습니다. 몸을 혹사하다 못해 녹초가 되어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먼 타지 핀란드 도시 생활은 자꾸 입꼬리를 귓가로 높게 이끌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녔고, 북유럽 특유의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혼자 피식 웃으며 즐거워 했습니다. 아침 열 시 즈음에 해가 떠서 두 시부터 노을이 시작되는 신기한 나라. 바쁘고 정신 없는 와중에도 노란 가로등과 곳곳에 있는 성당이 눈길을 끌었고, 이곳이 유럽임을 온몸으로 표현해주고 있었습니다. 출국 전까지 서럽고 속상했던 마음은 핀란드에서 일상을 보내며 샤르르 녹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시장에서 경험하는 색다른 경험들은 열정에 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데이기도 하고, 다시금 불씨가 살아나기도 했던 일주일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몇 십 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또 생애 처음으로 클럽을 가보기도 했던 놀랍도록 다채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인연들이 하나 같이 특별하고 소중했습니다. 한 여름, 쭈뼛거리며 찾아 뵈었던 아주 사소한 인연이 한 계절만에 이토록 넓은 세상이 되어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울면서 떠나온 공항에서 행복한 귀국을 맞았습니다. 준비하는 기간과 돌아오는 내내, 세상 걷는 길에 함께 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언제나 위로하고 응원해주던 사람들, 같이 즐기고 또 웃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위에 펼쳐진 풍경과 멋진 사람들에 고마움과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한번도 꿈꾸지 못한 곳에 서서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짚어본다.

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생을 끝까지 아름답게
걸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여행 에세이*의 한 구절처럼 꿈꿔보지 못한 장소에서 또 다른 미래를 그리고, 현재를 되짚고 있었습니다. 지금 처럼만 걷는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변종모作 (시공사)



*** 브런치 독자분들을 위한 글

- 1년도 넘게 적은 글들을 매주 한차례씩 전달드립니다.

 - 한 주를 또 치열하게 살아냈을 매주 토요일 밤, 지나온 발자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 여러분의 삶에 자그마한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